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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10년을 기다렸다 … LG야구 팬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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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올 시즌 LG가 선전하자 LG 극성팬들은 난리가 났다. 15일 잠실경기에서 한 여성팬이 팔에 링거를 꽂은 채 LG를 응원하고 있다. 그는 “맹장 수술을 받고 입원 중에 응원하러 왔다. 맹장이 터질까 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응원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15일 프로야구 잠실경기. 경기 초반 3-0으로 앞섰던 LG가 4, 5회 한화에 2점씩 내줬다. 역전을 허용했는데도 LG의 홈 잠실구장은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관중석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여러분 걱정 마세요. ‘약속의 7, 8, 9회’가 있습니다.” 역전 드라마는 진짜로 벌어졌다. 7회 이진영의 재역전 2루타와 정의윤의 쐐기타로 LG가 다시 앞섰다. 8회부터는 류택현·이동현·봉중근이 차례로 마운드에 나서 깔끔하게 6-4 승리를 지켰다.

 2002년 준우승 이후 무려 10년 동안이나 포스트시즌(4강)에 오르지 못한 LG가 확 달라졌다. 올 시즌 들어 짜릿한 역전승이 많아졌고, 한 번 잡은 리드는 좀처럼 빼앗기지 않는다. LG가 미치자 LG 팬들은 더 미쳤다. 꾸준히 LG를 응원해온 이들뿐 아니라 새로 팬이 된 이들, 다른 팀을 응원하러 떠났던 이들도 목 놓아 LG를 응원하고 있다.

 LG가 2006, 2008년 꼴찌를 할 때도 80만 명 안팎의 관중이 잠실구장을 찾았을 만큼 그들의 충성도는 대단했다. 2013년 LG는 삼성과 선두를 다투고 있다. 적어도 2위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을 기세다. 묵묵히 LG를 응원하고, 원망하고, 그리고 다시 응원했던 팬들은 요새 난리가 났다. 새로 생긴 LG 팬들도 많이 늘어났다.

 누가 홈런왕이 될지, 다승왕이 될지, 어느 팀이 우승할지 모르지만 올해 프로야구의 주인공은 이미 LG로 결정됐다. LG에 죽고 사는 네 명을 15일 잠실구장에서 만났다. 요즘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는 이들이다.

역전 승부 많은 불확실성이 매력

아이들과 잠실구장을 찾는 팬들이 많이 늘었다. LG 어린이 팬은 ‘엘린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대학원생 정의한(32)씨가 끌고 온 유모차에는 생후 3개월 된 딸 애린이가 있었다. LG 어린이 팬을 ‘엘린이’라 부르는데, 딸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의한씨는 외사촌 여동생 문희진(31)·희선(28)씨와 함께 왔다. LG전자에 근무하는 희진씨는 2006년 사촌오빠인 의한씨를 따라, 영국 런던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와 지난해 귀국한 희선씨는 언니 희진씨를 따라 잇따라 LG 팬이 됐다. 희진씨는 “두산 팬이었던 남자친구를 LG 팬으로 ‘전도’했다. LG 경기를 자주 함께 보면서 세뇌했더니 결국 넘어왔다”며 웃었다. 친구로, 가족으로 번지는 LG 팬덤(Fandom)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함께 자리한 김진환(30)씨는 7000여 명의 팬들이 찾는 ‘LG 트윈스 뉴스’라는 페이스북을 운영하고 있다. 진환씨는 “LG 야구를 쫓아다니며 보느라 여자친구가 없었는데 한 달 전 여자친구가 생겼다. 함께 LG를 응원하는 사이”라며 “요새 LG 성적이 올라가자 팬들끼리 커플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며 웃었다.

 LG 팬들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다른 팀 팬들로부터 동정과 조롱을 받았다. 진환씨는 “DTD라는 말만 들으면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DTD(Down Team is Down)는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뜻의 ‘콩글리시’다. LG가 매년 봄 반짝하다가도 결국 4강권 아래로 내려간다는 비아냥을 담은 야구계의 속어다. 희진씨는 “요즘 LG 팬들은 DTD를 ‘될 팀은 된다’로 해석한다”고 전했다.

 진환씨는 “가족 중 나만 LG 팬이다. 다른 식구들은 매년 꾸준한 성적을 내는 두산과 2009년 우승팀 KIA를 응원한다. 내내 놀림을 받았지만 응원팀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난 그냥, 무조건 LG였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괜찮았지만 나를 보는 시선이 문제였다. LG 모자를 쓰고 다니면 좀 측은하게 보는 느낌이 있었다. 올해는 성적이 좋으니 LG 모자를 쓰고 유니폼을 입어도 당당하다”며 어깨를 폈다.

 저마다 LG를 좋아한 이유는 다르다. 진환씨는 1990년 LG 창단 때부터 열성 팬이었다. LG의 멋진 줄무늬 유니폼과 화려한 선수들 등장음악에 매료됐다. 의한씨는 여러 야구팀을 좋아하다가 LG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에 반해 2006년 LG에 정착했다. 지금은 역전 승부가 많은, LG의 불확실성이 오히려 매력이란다. 시작이야 어쨌건 수년째 LG 팬들의 모습은 같다. 의리와 오기. 죽어라 응원한 게 아까워서라도 LG를 버리지 못한단다. 얼마나 더 응원해야 LG가 ‘가을 야구(포스트시즌)’를 할지 두고 보겠단다.

 창단 해인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LG는 94년 김재현(SBS ESPN 해설위원)·유지현·서용빈(이상 LG 코치) 등 신인 트리오의 활약으로 다시 챔피언에 올랐다. ‘신바람 야구’라는 조어가 등장하고 LG 팬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시점이다. 아저씨와 어린이 팬이 대부분이었던 90년대 프로야구에 여성들과 20대 젊은 층을 가장 많이 끌어들인 팀이 LG였다. 김성근 감독(현 고양원더스 감독)이 이끌었던 200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삼성에 패했던 게 그들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프로야구 원년인 82년 당시 유일한 서울 연고팀은 LG의 전신인 MBC 청룡이었다. 85년 OB(현 두산)가 대전에서 서울로 이동했고, 현재는 넥센까지 3개 팀이 서울을 연고지로 삼고 있지만 서울의 골수 야구팬들은 LG의 정통성을 가장 사랑한다. 게다가 ‘신바람 야구’가 만들어낸 호쾌함과 세련미는 서울 팬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김성근 감독이 해임되고 주축 선수들도 팀을 떠난 LG는 10년 동안 언더도그(Under dog·약체)였다. LG는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4강에 오르지 못한 팀이다. 비싼 선수들을 사들이고, 감독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현상이 계속 반복되자 ‘DTD는 과학’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지난해까지 8개 구단이 4강 팀을 가렸으니 단순 계산으로 포스트시즌 진출 확률은 정확히 50%였다. 2분의1 확률에서 10년 내내 실패할 가능성은 1024분의 1이다. 이 정도의 실패라면 특정한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구단, 감독·코치, 선수와 팬 등 LG 야구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의 공동책임이다.

"LG팬은 최고 배우자감” 우스갯소리도

LG 열성팬 문희선·문희진·김진환·정의한(오른쪽부터)씨가 잠실구장에서 열렬하게 응원을 하고 있다. 문씨 자매는 외사촌 오빠 정의한씨를 따라 LG 팬이 됐다. 김진환씨는 LG 소식을 다루는 페이스북을 운영한다.

 팬들은 LG를 버리지 못했다. 지난 10년 LG를 응원하는 건 몸에서 사리가 생길 만큼의 수양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LG 팬은 최고의 배우자감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10년 동안 LG를 꾸준히 사랑하는 남자라면 그의 끈기와 의리를 믿어도 좋다는 뜻이다. 의한씨는 “LG 팬이라고 놀림을 많이 받았다. 욱할 때도 있었지만 점차 의연해지더라. 잘할 때가 있으면 못할 때도 있는 거다. 과거 LG는 꽤 잘했다. 뭔가 퍼즐이 맞아가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라고 답했다.

 진환씨는 “지금까지 쏟은 정성이 아까웠다. 언젠가 LG가 꼭 해줄 거라 믿었다. 그게 팬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의리였다”고 말했다. 이들 덕분에 LG는 올 시즌 9개 구단 중 유일하게 경기당 평균 관중 2만 명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유니폼 등 상품 매출도 지난해보다 30% 이상 늘었다.

 지난달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는 LG 선수들이 웨스턴리그(LG·넥센·KIA·NC·한화) 11개 포지션을 싹쓸이했다. LG의 새 얼굴들이 다른 팀의 스타들을 밀어낼 만큼 LG 팬들은 열성적으로 LG 선수에게 투표했다. 이 과정에서 LG 팬들의 극성과 투표 시스템의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진환씨는 “우린 예전에 했던 것처럼 투표했다. 숨어있던 팬들이 갑자기 많이 나타나면서 그렇게 됐다. 결과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희진씨는 “투표에 참여한 팬들이 예년보다 늘었을 뿐이다. 올스타는 팬들이 좋아하는 선수를 뽑는 것 아닌가. 왜 LG 팬들이 욕먹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디엔가 ‘아직도 LG를 못 믿겠다’는 팬들이 있을 것이다. 의한씨는 “사실 7월까지 그런 이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조롱하듯 DTD를 노래했다. 그런데 이제 4강은 안전하지 않나. 내 주위에서 DTD를 얘기하는 이들은 더 이상 없다”고 말했다.

 LG는 이들에게 어떤 희망을 줬을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드는 투지, 똘똘 뭉치는 팀워크를 보여줬다. LG 팬들이 꼽는 몇몇 장면이 있다. LG의 달라진 끈기와 뒷심을 보여주는 사례다. 시즌 개막전이었던 3월 30일 인천 SK전에서 LG는 2-4로 뒤진 8회 초 1사 만루 찬스를 잡았다. 박용택의 밀어내기 볼넷으로 한 점을 만회한 뒤 정성훈이 만루홈런을 터뜨려 7-4를 만들었다.

 5월 23일 대구 삼성전에서 1-1이던 6회 초 삼성 포수 이지영이 투수 윤성환에게 공을 던지는 사이 3루 주자 권용관이 홈을 파고들었다. 깜짝 놀란 윤성환이 곧바로 홈으로 송구했지만 권용관의 발이 빨랐다. 홈스틸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역전을 만든 창의적인 플레이였다.

 6월 2일 광주 KIA전은 달라진 LG의 야구를 집약한 경기였다. LG는 2-4로 뒤진 9회 초 어렵게 동점을 만든 뒤 기적의 연장전을 시작했다. 포수 윤요섭과 최경철을 모두 교체한 뒤여서 1루수 문선재가 포수 마스크를 썼다. 한 번도 포수를 해본 적이 없었던 문선재는 마무리투수 봉중근과 10회 말까지 무실점을 이끌었다. 문선재는 10회 초 결승 2루타를 날리기도 했다. 어려운 경기를 이긴 김기태 LG 감독은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선수들을 향해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김기태 감독은 “자기 포지션이 아닌 곳에 스트레스를 줘서 미안하다. 그래도 선수들이 희생해주고 잘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LG 선수들은 “감독님이 우리를 믿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약팀이라고 꼭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과거 LG 감독들은 맨 앞에서 선수들을 끌고 가려 했다. 김기태 감독은 다른 방법을 썼다. 선수들을 다독이고 격려하며 맨 뒤에서 밀어주고 있다. 희진씨는 “감독님의 인터뷰를 보면 절대로 선수 탓을 하지 않는다. 항상 선수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게 너무 보기 좋다. 선수들도 감독님을 잘 따르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가을 야구 축제처럼 즐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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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LG는 무기력한 팀이었다. 4강 탈락이 어느 정도 결정된 이후엔 선수들이 먼저 포기했다. 내야 땅볼을 치고 1루까지 반도 안 가서는 터벅터벅 더그아웃으로 걸어오고, 훈련 때 옷매무새에 더 신경 쓰는 선수들이 있었다. 팀 성적보다는 개인 기록을 위한 플레이가 가장 많다는 지적을 받은 팀이 LG였다.

 LG의 문제점에 대해 여러 전문가가 지적을 해왔다. 그 가운데 ‘인기가 너무 높은 게 문제’라고 말하는 이들도 꽤 있다. 야구를 못해도 팬들이 좋아하고, 심지어 2군으로 떨어진 선수를 응원하러 교외까지 간다는 거다.

 희진씨는 “몇몇 선수들은 정말 안타까웠다. 인물 좋고, 인기 있으니까 선수 본연의 임무인 야구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옆에서는 죽어라 뛰는데 한두 선수가 폼 잡고 하면 팀 전체가 이상해 보인다”고 했다. 희선씨는 “야구만 잘하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는 선수들이 LG에 많다. ‘팀워크에 도움이 안 되는 선수가 왜 계속 LG에 남아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거들었다.

 LG 팬들의 사랑이 항상 따뜻하진 않았다. 과열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11년 8월 구단 버스를 세워 감독·선수들을 대상으로 청문회를 벌인 적도 있다. 그해 11월엔 LG 구단이 사령탑 경험이 없는 김기태 감독을 선임하자 일부 팬들이 구단 홈페이지에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들은 따로 홈페이지를 개설해 구단 비판을 이어갔다.

 의한씨는 “LG를 무작정 비난한 게 아니라 각성을 요구한 것이다. 달라지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팬들의 외침을 그들이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느꼈다. 물론 모든 팬들이 과격한 행동을 한 건 아니지만 오래 참고 기다린 팬들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희진씨는 “야구를 내내 잘할 순 없다. 그러나 선수들이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던 게 문제”라고 거들었다.

 영국에서 13년간 유학한 희선씨는 “영국에선 축구가 일상이다. 축구 빅매치가 열리는 날이면 시내가 한산하다.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축제가 벌어지고, 지면 사람들 전체가 예민해져서 거리를 다닐 때 조심스럽다. 그걸 오래 봐서인지 난 LG 팬들의 열정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응원과 원망을 반복하며 10년을 보내왔다. 해마다 9월 말이 되고 LG의 4강 탈락이 결정되면 팬들은 마지막 홈경기에서 그들만의 의식을 치렀다. 2만 명 이상의 팬이 잠실을 찾아 목이 터져라 LG를 응원하는 것이다. 경기가 끝나도 함성은 한동안 멈추지 않는다. 올 한 해 수고했고, 다음엔 더 잘해 달라는 당부다. 다른 팀은 10월 포스트시즌을 준비할 때 LG 팬들은 10년째 애잔한 뒤풀이를 했다. LG 선수들도 이젠 그 뜻을 알고 마지막 홈경기 때는 팬들과 함께 노래하고 응원을 한다. 의한씨는 지난해 마지막 경기 때 유격수 오지환이 던져준 유니폼을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LG 팬들에게 저주 같았던 10년간의 고통이 이제 끝나간다. 2013년은 그들에게 선물이고 축제다. 충분히 우승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다. 희진씨는 “1위 못해도 좋다. 가을 야구를 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위를 해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까지 본다면 원이 없겠다”며 웃었다. 희선씨는 “당연히 우승이 좋겠지만 올해는 포스트시즌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 같다. 가을 야구를 축제처럼 즐겼으면 좋겠다”고 거들었다. 10년을 기다려온 것치곤 소박한 소망이다. 얼마 전 딸 애린이를 얻은 의한씨는 LG도 자식 같다고 했다.

 “못하면 속상하고, 남한테 지면 얼굴도 보기 싫다. 그래도 LG를 미워할 수 없다. 자식이니까.”

김식·김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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