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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부가가치세 때보다 나아졌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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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고정애
논설위원

요즘 1977년 7월 부가가치세 도입 무렵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충 보기엔 기존 세제론 한계에 봉착, 새 세제안을 마련했다가 조세 저항에 부딪쳤다고 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딱 거기까지만 닮았다.

 이번 건은 잠시 제쳐두고 부가세부터 보자.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과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의 꼼꼼한 기록에 따르면 이렇게 진행됐다.

 시작은 71년부터였다. 남덕우 당시 재무부 장관이 유럽에서 갓 도입 중인 부가세에 주목했다. 후임인 김용환 장관도 계속 추진했고 76년 초엔 박정희 대통령이 부가세를 도입하겠다고 공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8개 세금을 묶어 새 세금을 만들어내는 일이니 어려움이 클 수밖에. 명칭을 두고도 곡절을 겪었다. ‘거래세’로 하려다 6·25 때 북한이 서울에서 거뒀던 세금이었다는 말에 포기했다. 실제론 ‘거래부담금’이었지만 그게 대수랴. 국민 반대가 심할 게 뻔한데 ‘빨갱이 세금’이란 욕까지 먹어서야 될 일도 안 될 터였다.

 유신통치 때였으니 일사천리였겠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대대적 홍보와 교육을 펼쳤는데도 시행 넉 달을 앞두고 경제단체장들이 난색을 표했다. 중앙정보부도 한국개발연구원도 연기 쪽이었다. 6월 경제장관들이 격론을 벌였는데 연기론이 우세했다. 김용환 장관은 그러나 다음날 대통령에게 “77년 7월이 적기(適期)”라고 보고했다. 대통령이 물었다. “부가세가 최선이고 우리가 꼭 도입해야 할 제도인가.” 김 장관이 그렇다고 하자 대통령이 이같이 답했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터이니 재무부 장관은 경제를 잘 챙겨라.”

 박정희 대통령은 6일 뒤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했다. 한 명 한 명 모두 의견을 밝히도록 했다. 여전히 연기론이 우위일 때 김정렴 비서실장이 나섰다. “6년간 국내외 전문가의 연구검토 끝에 성안, 입법됐으며…우리 세제 개혁상 처음으로 대대적인 준비를 완료해 시행에 들어갈 찰나에 있다. 연기한다면 (국회의원 선거 등으로) 80년에나 시행을 고려할 수 있는데 그때 가서는 경제계의 반발은 더욱 심할 것이다. 지금 하는 게 상책이다.”

 결국 예정대로 시행하기로 결론 냈다. 이듬해 총선에서 여당이 패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팀을 경질했다. 그러나 부가세는 손대지 않았다.

 이번엔 어떠했는가. 도전은 유사했다. 응전은 시원찮았다. 당시 관료에겐 자율권이 있었다. “부가세는 100% 관료 발상으로 이뤄낸 획기적 세제 개혁”(이장규 서강대 석좌교수)이었다. 이번엔 손발이 다 묶였다. 증세는 안 된다, 세목을 늘리지도 세율을 올리지도 못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족쇄’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여지가 적으니 해놓고도 표가 안 나고 욕만 먹은 격이다. 그것도 관료만. 관료도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데 세금을 더 내게 된 걸 두고 증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는가. 나랏돈이 들고나는 걸 뻔히 아는데 “증세 없이도 복지를 다하겠다”고 장담할 때 심정은 또 어떻겠는가. 권위주의시대에도 모여서 함께 논의했고 대통령이 결과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이번엔 그랬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부가세 도입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다. 그러니 자신이 추인한 세제 개편안이 논란이 되자 즉각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을 게다. 당시의 조세 저항이 떠올랐을 터이니 말이다. 그랬다면 관련 기억을 좀 더 되살렸으면 한다. “대통령이 간섭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장관이 책임지고 실무적으로 장단점을 따져서 검토하는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를 보장해줬다”(『대통령의 경제학』)는 사실도 말이다. 그래야 부가세를 두고 김정렴 비서실장이 하듯, 현 정부의 누군가도 “조세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하길 잘했다”고 회고할 ‘역작’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고정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