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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장 길었던 3일(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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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5일 밤늦게 조지훈(시인·고대교수·고인)씨는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는 연방 전황이 좋다고 보도하지만, 26일 하오부터 이미 고대에는 아군 것인지, 적의 것인지 모르지만, 포성이 들려왔고 더욱 기분 나쁜 것은 분명히 동두천이나 의정부 쪽에서 오는 피난민대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소를 몰고 고대 앞길을 지나가는 농부도 있었다. 가친은 국회의원이니까, 좀더 자세한 전황을 알 것이라고 전화를 건 것이다.
그러나 가친인 조헌영 의원(경북·영양·무·주=한의의 대가)은 비상국회에 나가 안 계시다는 것이었다. 일방통화로 끝난 이 전화가 부자간의 생전의 마지막 인연이 될 줄은 조시인도 차마 몰랐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조교수는 생전에 취하면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전화를 걸었으면 아버님과 이야기 할 수 있었을 텐데…그게 내 평생 한이란 말이야.(주=조교수 유가족과 친구들의 말)
26일 한밤중에 열린 비상국회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흥분한 의원들 갑론을박>
▲윤길중씨(강원원주·무·현 신민당정무위원·54) 『그때 국회에서 한 수도사수결의는 국회의원들이 흥분한 탓도 있지만, 정부가 아무리 도망친다 하더라도 수도사수의 엄연한 결의를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요. 수도사수의 결의까지에는 갑론을박이 오고 갔어요. 사수결의에 냉담한 측은 의원은 전투원이 아닌데 어떻게 사수결의가 되겠느냐는 주장이었지요.
현실적으로 정부가 옮기게 될 경우, 국민들에게 실정을 이야기하고 정부를 믿고 따르라고 하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수결의가 통과되어 국회는 정·부의장인 신익희·조봉암씨로 하여금 이대통령을 방문케 하여 결의사실을 알리고 현재의 상황, 미군의 출동여부, 정부의 기본대책을 알아보도록 했읍니다.
27일 새벽 5시쯤 회보가 왔는데 모두 없다는 거예요. 나는 조소앙·이청천 의원들에게 이런 난국에 처하여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보았더니, 조의원은 아무리 결의가 있어도 떠나갈 사람은 떠나게 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집에 와서 신의장 댁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분과 나는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만일 피난 간다면 같이 가기로 되어있었지요. 그런데 벌써 나갔다는 거예요. 참, 서운하더군요.』
▲서범석씨(현 신민당 국회의원·69) 『27일 새벽에 국회가 급히 열려 수도사수결의를 했다고 하지만, 나는 연락을 전혀 받지 못해 참석지 못했읍니다. 27일 아침에 천안으로 떠나는 이상돈 의원에게 내 아이 셋을 부탁하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떠나기로 했읍니다.
그러나 가친(제헌의원 서정희씨·고인)은 국민을 버리고 어떻게 가겠느냐, 못 떠나겠다라고 끝내 고집을 부리셔서 그대로 인촌(고 김성수씨)댁으로 갔지요.
나는 미군이 한국을 무책임하게 버려 두지 않을 것이며 곧 수도는 탈환될 것이라 생각하고, 27일 하오 3시쯤 혼자 한강을 넘었읍니다.』

<남침정보 몰랐느냐 호통>
▲김용우씨(당시 서대문갑·무·현 보이·스카웃 연맹총재·58) 『나는 수도사수가 전술·전략적으로 무의미하며 국회가 버티고 있을수록 더 많은 전투요원의 희생이 있을 뿐이라는 견지에서 이에 반대했으나 그때의 분위기는 논리적 설득이 불가능했어요.
그날 아침(27일)에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전황을 대충 설명한 뒤 행정부의 지시에 따르다보니 나의 선거구민(서대문갑)들에게 피난토록 전하지 못했다. 당신은 선거구민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겠다고 말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이야기 같지만, 그땐 정말 비장하게 그런 말을 했어요. 집사람도 고개를 숙이더니 알겠어요 하더군요.』
6·25가 났을 때 2대 국회를 출입하던 한 정치부 기자의 증언을 들어보자.
▲박홍서씨(당시 연합신문 국회출입기자·현 편집인협회 사무국장·55) 『그때 나는 정치부 기자로서 국회에 나갔지요. 같이 어울린 기자로는 김진학·백광하·편용호·한경원 등 15명쯤이었어요. 전쟁이 난 25일은 공일이었고, 또 국회의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는지, 개회를 못했어요. 우리 국회출입기자들은 25일에 사태가 벌써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뭐 국회가 이래하며 서성대던 생각이 납니다.
결국 그날은 흐지부지 지내고, 그 이튿날(26일) 상오 11시쯤 국회가 열렸는데 사회는 신익희 의장이었지요. 그때 정부측에서는 신성모 국방과 채 참모총장이 나왔는데 조소앙 의원(납북)이 어떻게 돼서 적의 이런 남침을 몰랐느냐?고 호통친 생각이 납니다.
개회된 지 얼마 안 있다가 적 야크기가 삼청동에 기총소사와 폭격을 해서 회의가 중단됐어요. 그 후에 국회가 다시 모여 소위 비밀회의를 연 모양인데 그 회의를 기자들은 취재를 못했읍니다.』
26일 야반의 비상국회를 취재한 기자는 물론이려니와, 더구나 방청자는 없었다. 대부분의 국회의원들도 연락을 받지 못해 참석 못했으니까, 그 야간비상회의는 생존의원들의 증언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이 비상회의에서 막상 수도사수를 결의하고, 이를 이대통령에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행정부가 이미 진공상태임을 알자 2백10명의 국회의원들도 허둥지둥 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각자행동을 취한 것이다.

<피난한 의원은 백48명뿐>
기록과 증인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총2백10명의 2대 국회의원 중 북괴의 서울침공직전이나 직후에 한강이남으로 빠져나간 국회의원은 1백48명이었다. 나머지 62명은 그대로 서울에 남았다가 북괴정치보위성 분자들에게 감금, 혹은 연금된 채 적치 3개월 동안에 갖은 곤욕을 겪었다(후기). 이 적치 3개월을 체험한 62명중 35명은 천신만고 끝에 1950년9월28일에 다시 대한민국 품에 안겼지만, 본문서두에 나오는 조지훈 교수의 가친인 조헌영 의원을 비롯한 27명은 9·28 서울수복직전에 납북 혹은 피살되었다. 참고로 납북된 2대 국회의원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원세훈 장연송 윤기섭 조소앙 ▲경기=안재홍 이종성 유기수 백상규 김웅진 김경배 ▲충북=조종승 ▲충남=김헌식 구덕환 박철규 신석빈 ▲전북=최병주 최윤호(피살) ▲전남=정인식 김용무 김홍용(피살) ▲경북=조헌영 조규설 박성자 양재하 ▲경남=김칠성 신용훈(행방불명) 이상경 국회의원납북 때의 모습을 민생 안재홍씨 부인 김부례 여사(62·성북구 송천동77의14호)로부터 잠깐 들어보자.

<트럭에 실려 부귀의 납북>
『9월22일께(주=유엔군의 인천상륙 1주일 후)라고 짐작되는데 그때 나는 돈암동 시동생 집에 있었어요. 저녁 7시쯤 전에 안면이 있는 조선일보에 있던 권태희가 와서 면회와 차입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급히 짐을 꾸려 큰 건물 있는데로 갔지요(주=국립도서관인 듯·당시 북괴정치보위부 남한본부). 가보니까, 주인이 7, 8명의 국회의원들과 한방에 있더군요. 그래 옷만 우선 들여보냈지요. 조금 있으니까 주인이 트럭 위에 막 올라탔어요. 그냥 서로 멍하니 마주보다가 주인이 겨우 하는 말이 내 다른 보따리는 어떻게 찾지?해서 검은 보자기예요 하자마자 차는 떠났어요. 그것이 마지막인줄은 몰랐읍니다.
주인 이야기를 더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분은 전혀 물욕이 없었어요. 하긴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이니까요. 나도 부처님만 믿고 나머지 삶을 살아가렵니다…(주=김여사는 사고무친·소생도 없음).』
북괴는 납북국회의원들을 데려다가 소위 남북평화통일협의회를 만들고 대남방송 등 부역을 강요했으나, 이용가치가 끝나는 대로 숙청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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