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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폭염 좀비' 들이 출몰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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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이마와 턱밑에 땀이 차오른다. 더위가 숨통을 조여 온다. 이젠 크레용팝의 ‘빠빠빠’ 가락도 ‘직렬5기통 춤’도 다 귀찮다. 그래도 우린 견뎌낼 것이고 살아남을 것이다. 어차피 처음이 아니지 않은가. 불굴의 애국심과 정신력으로 맞서는 위기가.

 그러니까 ‘전력대란과의 전쟁’이 선포된 건 지난 일요일(11일)이었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한국전력 본사 상황실에서 긴급 대책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했다. 윤 장관은 “발전기 한 대만 고장 나도 순환 단전을 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며 “나라가 어려울 때 늘 정부를 믿고 도와주셨듯이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의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렇게 ‘공포의 월·화·수’는 시작됐다. 전국 2만여 개 공공기관의 에어컨 전원스위치가 한꺼번에 내려졌다. 공무원들은 암실 속에서 컴퓨터 모니터에 휑한 눈을 껌뻑이다 바람 통하는 곳을 찾아 어두운 복도를 비척거리며 걷는다. 대기업도 전력위기 극복을 위한 전기절약 캠페인에 동참해 생산 차질을 감내하고 있다. 회사원들 와이셔츠는 땀에 전 지 오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역시 설국열차가 아닌 “열국(熱國)열차”다. “덥고 눈 아프고 일이 안 된다”는 호소와 “더위에 지쳐 말을 잊은 좀비들” “인권유린”이란 자조가 넘쳐난다. “냉방 욕구 자극하는 에어컨 광고를 제한하자”는 냉소로 열기를 식힌다. 바야흐로 국가가 신체를 넘어 정신까지 통제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공무원과 회사원들을 순식간에 ‘폭염 좀비’로 만든 “올여름 최대의 전력위기”(윤 장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가장 큰 책임은 전력 수요 변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정부 자체에 있다. 2006년 말 정부는 2012년 최대 수요가 6712만㎾일 것으로 추정했으나 실제로는 7429만㎾였다.

 이 11%의 계산 착오를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위기로 악화시킨 주범은 원전 비리다. 부품 시험성적서 위조 사실이 드러나면서 신고리 1, 2호기 등 원전 3기가 멈춘 상태다. 이들 원전만 가동돼 300만㎾의 전력을 생산했다면 우리는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지금까지 검찰 원전비리 수사단이 기소한 비리 관련자는 90여 명으로 이중 26명이 구속됐다. 한국수력원자력 부장과 지인 집에서 6억여원의 현금다발이 발견됐고 그에게 10억원을 건넨 혐의로 현대중공업 전·현직 임직원들이 구속됐다. 나아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 대한 로비 의혹까지 불거지며 권력형 게이트로 번질 조짐이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처벌이다. 사회에 미친 영향을 감안해 형량이 가중되겠지만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 대법원은 최근 비슷한 혐의(뇌물)로 기소된 한수원 전직 간부들에게 징역 10월~8년형을 확정했다. 과연 이 정도 처벌이 전국을 공포에 빠뜨리고 산정하기 힘든 피해를 끼친 죄의 대가로 적정한 것일까.

 감정적 대응으로 스트레스를 풀자는 얘기가 아니다. 경제가 고도화되고 사회의 네트워크가 촘촘해지면서 한 개인이나 집단의 범죄가 가공할 결과를 낳곤 한다. 이번 비리가 사고로 이어졌을 경우 재앙을 몰고 왔을 가능성이 크다. 국민 안전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범죄에 대해선 징벌적 성격을 대폭 강화해 재발 방지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미국 법원이 여성들을 납치해 10년간 성폭행한 자에게 종신형과 징역 1000년을, 분식회계로 경제를 뒤흔든 엔론 최고경영자에게 징역 24년을 선고한 이유다.

 개인과 기업이 절전에 게을렀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고 죄책감을 갖는 건 정상이 아니다. 정전 불안에 목숨을 위협 받는 환자들은 또 어떠한가. 우리가 “거위 깃털” 소리 들으면서도 세금을 내는 건 국가가 생명과 재산, 최소한의 문명 생활을 보장해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박근혜정부가 그 기대만큼은 지켜주길 바란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