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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음악 -박용구<음악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브르봉」왕조의「루이」14세는 청나라의 성조 강희황제에게 그의「프로필」을 그린 초상화를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초상화를 받은 강희황제는 매우 놀랐습니다.
「아니, 오랑캐는 이마에 뿔이 있다더니 임금이란 자는 얼굴이 절반밖에 없구나.』 산간벽지에 사는 사람도 오늘날 옆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고 얼굴이 반쪽밖에 없다고 놀랄 사람은 없겠으나 그것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볼 수 있느냐는 점에는 문제가 있을 듯 하다.
그렇다고 강희황제나 산간벽지의 사람이 아름다움을 못 느낀 다기보다는 아름다움의 척도가 다르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수 천년 전에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고대 「이집트」는「프로필」을 즐겨 그렸으되 눈만은 정면을 향한 윤곽이 아니겠습니까.
지역과 종족에 따라서 사물을 보는 미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악의 척도에서 국악을 보아서는 마침내 국악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작곡자의 이름을 밝히는 양악이 시대의 얼굴과 개인의 얼굴을 갖기 위해서 표현방법을 추구해 왔다고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 「테이블·뮤직」(식탁음악)인 국악은 오로지 자연과 인간과의 「중화지성」을 추구했다고 보겠습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밝혀둡니다만 내가 국악이라고 할 때, 그 범위는 농악·판소리·민요 등을 제외한 아악중심의 우리음악을 말하는 것이며, 국악을 감히 「테이블·뮤직」이라고 한 것은 행렬을 위한 취타악을 제외하면 연악은 물론이요, 제향 음악이건 식전음악이건 진정한 의미의 「퍼블릭」(공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나 상전의 음식 맛을 돋우기 위해서 음악이 연주되었다는 뜻에서입니다.
그리고 술과 음식을 곁들인 음악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염원한 국악이 얼마나 심오한 삶의 기도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가는 양악의「테이블·뮤직」-. 이를테면 「모차르트」의 「세레나데」같은 합주곡을 들어보면 비교가 될 것입니다.
유구한 시간 속에 일어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다가 유구한 시간 속에 다시 사라지기를 원하는 국악.
그 속에서 삶의 기도를 듣는 우리네 선인들에게 시대의 얼굴이나 개인의 얼굴은 추잡하고 음란한 것이기조차 했습니다.
음악의 대가였던 공자님이 그것을 「음성」이라고 해서 철저히 배격했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학문이 2천년 동안 공자님의 가치체계를 준수하고 그 해석에 머무른 것처럼 공자님의 음악관을 받들어온 국악에서 혁신이나 반역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요.
음악관의 변화 없이 음악어법이나 형식의 근본적인 변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영명하신 세종대왕조차 아악용 악기를 모두 국내에서 제작시켜 중국을 능가했으면서도 그 작업은 공자님의 음악윤리를 보다 정확하게 구현하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님의 가치체계나 음악윤리가 그대로 준수될 수 없는 오늘, 국악이 문화재로서 보존되는데 그치지 않고 현대사회와 더블어 살아가는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시대의 얼굴과 개인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그 나름의 표현방법이 모색되어야 하겠지요.
먼 안목으로 볼 때 국악의 향기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길이 여기에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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