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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속에 자란「집안의 문제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서울 강변3로 여인피살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오빠 정종욱씨(자)는 집안에서도 항상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불만속에서 나날을 지내왔다.
특히 집안의 경제권을 완전히 쉰 교만스런 여동생 인숙양 (26)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무안할 만큼 자기를 죽여야했던 그는 하루도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민했다는 것.
대구 부시장을 지낸 정도환씨(66·본적 금능군개령면동부리227)의 6남매중 4남으로 태어난 종욱씨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해도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귀염둥이로 자라왔다.
자유당정권이 무너지고 아버지가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도 2학년까지 다니던 대구 모 상업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군에 입대했다.
착실하고 내성적이던 그는 학업을 중단하게 되면서부터 성격이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군에서 모 특수기관 지휘관의 운전병으로 있으면서도 세번이나 탈영하는등 부모들의 애를 태웠다.
제대한뒤 종욱씨는 하는 일없이 집에서 놀며 형의「오토바이」「라디오」등을 닥치는 대로 팔아 며칠씩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는등 집안의 골칫거리가 됐다.
65년8월 셋째 형수의 소개로 미용사인 김모씨(29)와 결혼했다. 이때 그는『기술자로 일본을 가게 됐는데 결혼을 해야만 갈 수 있다』고 김씨를 속여 약혼식만 해놓고 혼인신고를 마쳤다.
그와 4년동안 결혼생활을 한 김씨는 종욱씨의 정체를 끝내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의 돈으로 서울 동대문구 보문동 2만원짜리 전셋방을 얻어 결혼생활을 시작한 종욱씨는 언제나 새벽 4시쯤엔 집을 나가 밤 12시가 넘어서야 돌아오면서도 1년이 다 되도록 돈 한푼 들어놓지 않았다. 이래서 결혼초부터 가정불화가 계속됐다. 결혼 1년쯤지나 종욱씨는 모 영화사 사장 최모씨의「지프」운전사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한달에 1만6천여원의 돈을 월급이라면서 김씨에게 갖다 주었으나 끝내 운전사라는 그의 직업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
68년3월 종욱씨는 최사장의 소개로 제과점 고려당 명동분점의 자가용 운전사로 69년2월까지 근무했다. 그는 주차장 부근인 명동골목길에서 암「달러」장을 하던 현부인 고씨(25)와 알게됐다.
고려당에 들어간뒤 처음 몇달동안 착실하게 일했고 운전기술이 뛰어나 신임을 얻었으나 고씨를 사귀면서부터 주인의 눈에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씨를 차에 태워 놀러 다니며「카·폰」의 요금을 마구 올려 69년 2월 주인은 그를 해고했다.
그동안 종욱씨의 본처 김씨는 남편이 갖다 주는 월급을 모아 10만원짜리 전셋방으로 이사까지 했지만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해 69년 5월 합의 이혼했다. 그뒤 69년 11월15일 현재의 부인 고씨와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재혼했으나 이때 집안살림을 도맡고 있던 동생 인숙양은『변변한 직업도 없으면서 여자만 갈아치우려느냐』고 식구들앞에서 오빠를 호되게 나무라면서 재혼을 반대하기도 했다는 것. 재혼한 종욱씨는 서울 종로구 서린동55의1 자동차 소개업체인 중앙공사에 들어가 자동차「브로커」로 일해 왔으나 이곳에서도「커미션」관계의 부정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인숙양의 주변
대구 S여고와 전S문리사대 가정과를 나온 인숙양은 일어와 영어를 잘해 5, 6년전에는 모 무용연구소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무용해설을 맡기도 했다. 그 뒤에는 요정 선운각에「헬렌」이란 이름으로 나간적이 있었다.
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26장의 국내 저명인사의 명함을 인숙양의 패물함에서 발견, 그녀가 국내저명 인사나 외국인들과도 공개적인 접촉을 자주 갖고 최근에는 윤모씨룰 비롯한 영화배우들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지난 69년 초에는 일본에 있는 오빠의 초청으로 3개월동안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 인숙양의 여권은 회수로 MA1064Z호, 62년 12월30일 발행된 것이나 여행목적이 단순한 방문으로 돼 있어 이 여권이 불법발급된 것임이 드러났다.
경찰은 외무부에 보관되어 있어야 할 여권발급 관계서류가 사건직후 없어진 것을 알아내고 인숙양의 교제범위에 상당한 실력자가 있은 것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인숙양은 항상 종욱씨의 성격을 식구들앞에서 무안할이 만큼 호되게 나무랐고「호텔」등에서 2, 3시간씩 오빠를 차안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예사였다는 것.
인숙양은 또한 종욱씨가 재혼할때 집안 식구들의 권에 못이겨「다이어」반지를 해주었으나 항상『집안에서 돈달라는 사람이 많아 못살겠다』는등의 불평을 해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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