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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의 미 민권 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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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뉴요크=장두성 기자>60년대를 통해서 미국 사회에 폭력과 불신의 위기를 몰고 왔던 흑인 민권운동은 흑인들의 요구가 정당한 것이며, 그 요구가 원만히 충족되기 전에는 미국 사회의 안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민권 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인식시키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성과에서부터 시작되는 70년대 민권운동의 과제는 60년대 보다 더 많은 난관이 놓여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뚜렷해진 움직임의 하나로 민권 운동과 노동 운동사이의 분열을 들 수 있다.
민권운동 지도자회의라는 기구아래 흑인 지도자들과 미국 노조연합회는 지날 10여년 동안 민권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공동의「로비」활동을 벌여왔었다. 노조 측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민권운동이 지금정도의 제도상의 승리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조의 협조는 큰 힘을 작용했었다.
그러나 지난 연말, 정부 산하의 건축 공사에 20%의 흑인노동자를 채용해야 된다는 내용의 소위『「필라델피아」계획』이 의회에 상정되자 노조 측에서는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나섰다.
민권운동과 노동운동의 10여 년에 걸친 밀월이 빵을 앞에 놓았을 때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흑백인 학교 통합계획도 퍽 미묘한 과정을 거쳐서 급격한 퇴보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최초의 가장 확실한 민권운동의 승리로 간주되었던 54년의 연방 대법원 판결문은 학교 통합이『모든 목적의식적인 속도로』이루어져야 된다고 명시했었다. 각 주 정부에 상당한 재량권을 허용했던 이 구절은 69년 10월『즉각으로』실시되어야 한다고 수정되어 이 핑계 저 핑계로 통합을 미루어 온 주로 남부 7개 주의 학교에 즉각적인 통합을 명령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은 상원 군사위원장인「스테니스」의원을 중심으로 한 남부 출신 의원들과 「리비코프」의원을 위시한 북부의 일부 진보파 의원들로부터 나왔다. 이들의 주장은 남부의 학교를 통합하려면 사실상 흑인이 분리된 북부의 학교도 똑같은 기준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지난 2월 공립학교 보조비 지급 법안에 삽입되어 상원을 통과했다.
이에 대해 민권 운동에 동정적인「월터·몬덜」상원의원은『이 나라가 과연 인종평등의 원칙을 진실로 믿고있는지 의심스럽다』고 개탄하고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권운동에 역조현상이 뚜렷해진 데는 자유주의 풍조가 있은 다음에는 반드시 보수주의의 반동이 따르는 미국 정치의 전통에도 있지만, 소위「남부전략」으로 알려지고 있는「닉슨」의 정책 노선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상징적인 승리만을 놓고 불만이 커 가고 있는 2천 2백만의 흑인과「인플레」,월남전의 중압 밑에서 흑인들에게『너무 많은 혜택을 너무 빨리 줄 수는 없다』고 불평하는 백인중산 계급이 일정한 빵을 앞에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단계- 그것이 70년대 민권운동이 겪어야 할 난관이다.「닉슨」행정부는 이미 이 싸움에 대해『선의의 무관심』을 정책으로 취할 때가 왔다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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