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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무비·카메라」를 메고 20년-기록영화 제작의 장점동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앞으로는 좋아질 거요.』지난 2윌 1일 대한체육회로부터 특별 공로상을 받은 장점동씨(56)는 사설 문화영화사의 사장이자 단 한명 뿐인 「무비·카메라맨」. 그가 20년간 쌓아올린 탑은 6백80여km의 「필름」더미이다. 그것은 생동하는 사료임에 틀림없는데, 어깨를 한번 펴 볼 수 없는 가장이라면서도 내일은 낙관할 수 있단다.
서울 을지로 6가 전화국 오른편 전화상과 「스테인리스」가게가 이마를 부딪치며 다닥다닥 늘어선 거리를 아무리 오르내려도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가게마다 물어봐도 도무지 아는 이가 없다.
30분은 헤매다가 다 낡은 목조건물의 처마 밑에서 책장만한 간판을 찾아냈다. 「공영 스포츠 문화영화사」. 비좁은 통로가 끝나니까 삥둘러 판잣집. 그 한 구석에 장씨는 세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셋방살이 10년이라 한다.
간판이 회사이지, 사실은 그의 거실이자 창고이다. 마루에도 반침에도 「필름」통이 수북수북 쌓여 있다. 「스포츠」계의 기록「필름」이라면 독보적 존재인 장씨이지만 그밖에도 거리의 갖가지 시위행진이며 어떤 단체의 행사나 기공식 및 국회내부까지 광범하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서울거리는 하도 누비고 돌아다녀 수도의 발전사를 엮는데는 다시없는 보배.
그의 초라한 거실의 벽면에는 감사장, 표창상, 공로상장 등이 몇 장 덩그렇게 걸려 있다. 노고에 대한 사회로부터의 치사요 보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활동에 얼마큼 독려와 보탬이 되었을까.
다만 체육회는 이번 공로상 수여와 함께 「필름」값을 연간 몇 10만원씩 보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노라고 그는 환한 웃음이다.
집이 2채나 날아갔고, 버는 족족 「필름」속에 묻어 들어갔다. 1시간 30분 짜리 「스포츠」기록영화를 2편이나 제작했지만 그게 장사될 리 없었다.
『「필름」만 넉넉하면 참 골고루 찍어 놨겠는데 마음대로 안되더군요.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곤 대개 청탁을 받아 나갔지요. 물론 체육행사만은 예외입니다만.』
「무비·카메라」를 입수하면서 시작했노라고 했다. 24세 때부터 「스포츠」사진에 관심을 두었던 그다. 그는 젊어서 연식야구의 선수였다. 그런 까닭에 일제 중고품인 「필모」(촬영기)를 갖게되자 내내 경기기록에 열을 올렸다.
그 첫 작품이 1947년의 단편『조선「올림픽」과 성화』. 이어 『한국의 건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러한「필름」들은 대부분 6·25동란 때 소실하고 부산에서 다시 촬영기를 구해 찍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다.
『손기정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1등으로「골인」하는 광경이 눈물겨워 나도 그<민족의 제전>같은 영화를 만들어보기로 작전했던 거지요. 그래서 운동장의 불청객이 모든 경기를 꼬박 지켜왔는데 이젠 그게 물건이 될 단계에 이른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찍어놨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53, 54년에 『영광의 제전』『승리의 제전』이란 장편영화를 각각 제작했다. 전국 체육대회를 중심으로 엮은 영화였다. 그러나 그것은 본전도 나오지 않았다. 「스폰서」도 장씨도 함께 망했다. 그는 생각다 못해 「필름」과 영사기를「륙새크」에 짊어지고 지방순회에 나섰다. 광주·목포·마산 등지의 주로 학교에서 틀어봤다. 학교측에선 사례금을 얼마씩 내놓았지만 그것은 경비도 안되었다. 나중에는 시골 학생들에게 체육대회 구경을 시켜주는 셈치고 보여주기로 했다.
장씨는 그대그때 10분∼15분 짜리 단편기록영화를 제작해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또 제작비를 충당한다.
소 같이 일 할줄밖에 모르는 강씨는 스스로 쌓아올린 공든 탑을 앞에 놓곤 아주 낙관하고 자족해 한다. 앞으로의 기대보다는 오히려 기록 그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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