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미래] 세상 바꿀 탄소나노튜브 곧 실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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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그물을 원통형으로 말아놓은 모양. 가장 가는 것의 지름은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이며 굵어도 1천분의 1밖에 안된다.

길이도 다양해 현재까지 만든 가장 긴 것이 1㎝ 정도이고, 제일 짧은 것은 그 1백만분의 1에 불과하다. 구성 성분은 탄소다.

잡아당기는 힘에 버티는 것은 다이아몬드보다도 강하다. 탄소가 늘어선 모양에 따라 구리선보다 전기를 잘 통하는 도체가 되기도 하고, 반도체가 되기도 한다.

'꿈의 신물질'이라 불리는 탄소나노튜브의 신상명세서다.

1991년 발견된 탄소나노튜브는 나노m(10억분의 1m) 정도의 몹시 가는 굵기와 여러가지 독특한 성질 때문에 세상을 바꿔놓을 물질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올해 그 기대가 현실화될 전망이다. 50년대의 '반도체 혁명'에 비견할 만한 '탄소나노튜브 혁명'이 막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탄소나노튜브 TV=나노튜브 시대의 시작을 알릴 주인공.이르면 올해 안에 삼성 SDI에서 시제품이 나올 예정이다.

기존의 브라운관 TV에는 '전자총'이 있다. 여기서 나온 전자들이 브라운관 안쪽의 형광물질에 부딪쳐 빛을 내게 한다. 탄소나노튜브 TV에서는 나노튜브가 전자총 역할을 한다.

뾰족한 물질은 전압을 조금만 걸어줘도 끝에서 전자를 내뿜는다. 나노튜브도 아주 가늘고 긴 모양이어서 전압을 가하면 전자를 내쏜다. 이것이 형광물질을 때려 빛을 내게 하는 게 바로 탄소나노튜브 TV다.

브라운관 TV는 전자총이 하나지만,탄소나노튜브TV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전자총이 있다. 화면의 점 하나에 수십~수백개의 나노튜브에서 튀어나온 전자가 충돌한다.

그래도 전기는 브라운관 TV보다 훨씬 적게 든다. 나노튜브 하나가 전자를 뿜는데 필요한 전압이 워낙 작기 때문이다.

나노튜브 TV의 또하나의 장점은 매우 얇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궁극적으로 현재의 벽걸이 TV보다도 더 얇아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TV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일본에서는 나노튜브가 내쏜 전자를 형광물질에 충돌시켜 나오는 빛을 이용해 조명기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반도체의 한계를 깬다=지금의 메모리 등은 반도체 물질 위에 회로를 새겨 넣는 식으로 만든다. 그래서 기억용량을 늘리려면 회로를 더욱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지난해 삼성은 선폭이 90나노m(머리카락의 약 1천1백분의 1)인 회로를 그릴 수 있는 기술로 초고집적 메모리를 개발했다.하지만 회로 선폭을 줄이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져 곧 한계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하면 이런 한계를 쉽게 깰 수 있다. 가느다란 나노튜브는 굵기가 머리카락의 10만분의 1. 삼성의 기술로 만든 회로 선폭 90나노m 보다 1백배 가늘다.더욱 가는 회로를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재료인 것이다.

이미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메모리가 가능하다는 것은 삼성종합기술원 최원봉 박사팀과 미국 IBM의 연구진 등이 확인했다. 그러나 확인은 정보를 저장하는 '방'을 단 하나만 만든 상황에서 이뤄졌다.

쓸만한 메모리를 만들려면 이런 '방'수십억개를 한데 모아놓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 최박사팀은 가로.세로 1㎜ 안에 탄소나노튜브 약 4천만개가 고르게 늘어서게 하는데 성공한 바 있다.

이렇게 정렬한 나노튜브 하나하나를 정보저장 장소로 만들어 서로 연결하면 지금보다 수백배 용량이 큰 메모리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밖의 응용=와이셔츠 단추를 다는데 대바늘을 쓸 수는 없는 노릇. 마찬가지로 나노 크기의 물질을 다루려면 나노크기의 도구가 필요하다. 탄노나노튜브가 그런 도구를 만드는 후보다.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는 미국 컬럼비아대 김필립(물리학과) 교수가 해냈다. 각각 굵기 50나노m 정도의 나노튜브 다발 두개를 만든 뒤 전기를 가해 다발 두개가 젓가락처럼 움직이게 했다. 이를 이용해 무게가 1조분의 1g에 불과한 작은 플라스틱 공을 집어내는데 성공했다.

탄소나노튜브는 또 원통의 안쪽면과 바깥 면에 많은 수소 원자를 붙잡아 둘 수 있다. 일종의 초미니 수소 저장탱크인 셈이다. 그래서 수소를 필요로 하는 연료전지 등에도 응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전세계에서 관련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희한한 성질=보통의 물질은 같은 굵기라면 길이가 길수록 전기 저항이 커져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탄소나노튜브는 길이가 늘어도 저항은 그대로다.

만일 아주 길게 만들 수 있다면 지금의 구리 전선은 당장 나노튜브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길이 1㎝가 넘는 것은 만들지 못하고 있다.

나노튜브는 또 굵은 것 안에 가는 것이 들어 있고 그 안에 더욱 가는 것이 든 식으로 겹쳐 있으면, 하나만 있을 때보다 전기가 훨씬 잘 통한다. 빨대를 묶은 것처럼 여럿을 다발로 만들어도 마찬가지로 전기가 더 잘 통한다.

서울대 임지순(물리학부) 교수는 "탄소나노튜브는 구조가 아주 간단하면서도 독특한 전기적 성질을 갖고 있다"면서 "때문에 순수한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도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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