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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루손도 원주민의 진기 풍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루손」도 북쪽 산악지방엘 갔더니 괴상한 풍속을 가진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고로트」족이라고 하는 부족인데 이 종족의 이름은 「산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라는 것. 이들은 정부 없는 사회랄까, 족장이란 제도가 없이 자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오붓하게 살고 있었다. 어쩌면 저 중국의 전국시대 때의 도원경과도 같은 「유토피아」였다. 이들은 어떤 중대한 일이 있으면 온 동네 사람이 집합 장소에서 회의를 열어 결정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원시적인 「데모크라시」사회랄까.
그런데 이 원주민의 풍속으로서 독특한 것은 사람이 죽으면 훈제육을 만들듯이 솔잎을 피워 그 위에 시체를 옷 입은 채로 그을려서 산에 있는 굴속에 고이 넣어둔다는 것이다. 세계의 장례법이 가지가지지만 이 훈제 「미이라」는 「이집트」의 그것에 못지 않은 듯.
그런가 하면 이 북부 지방엔 「이프가오」족이란 종족도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큰 나무 통을 도려내어 파내서 그 속에 한 쌍의 부부들이 들어가서 자는 것이다. 나무가 클수록 「스위트·홈」의 자랑거리가 되는데 서로 남의 부부에 지지 않으려고 「정글」속에 들어가 큰 나무를 베어 물소(수우)로 날라 온다는 것.
이 원주민은 성격들이 매우 용감하고 단체생활을 잘하며 호투적일 뿐 아니라 그전에는 사람의 목을 자르는 풍속까지 있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니 그만 시간 여유가 없어서 가보진 못했으나 이 지방엔 산의 경사에 교묘하게 만든 「계단식 논」이 있다고 한다.
규모가 큰 것은 산기슭에서 꼭대기까지의 높이가 약 1천m로서 몇 백 층계로 되어 있다는 것. 한 방울의 물도 딴 데로 새지 않고 위 층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가는데 해마다 1월에 씨를 뿌리고 그 해 6월에 거둬들이며, 추수 때에만 잠시 물을 뺄 뿐 논이 말라 트지 않도록 1년 내내 물이 흐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완성하는 데는 2천년 동안은 걸렸다고 하니 저 이름 높은 「페루」의 「잉카」유적인 산상의 「마추비추」의 그것보다도 훨씬 역사가 오랜 셈이다. 이 계단식 논은 총 길이가 약 2만5천킬로로서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한다.
이 원주민이 비록 원시생활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높은 산을 이용하여 이렇게들 훌륭한 농업왕국을 이루었다는 것은 이들의 조상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루손」도 북쪽의 여행을 마치고 밤낮으로 버스를 타고 「마닐라」시로 내려오다가 태평양전쟁 때의 저 이름 높은 고전장 「바탄」과 「코레히도르」도와 아울러 「아라얏」화산을 찾기로 했다.
지도를 펼쳐보니 지름길이 있기에 내리겠다고 했더니, 운전사며 여객들은 치안 사정이 나쁘니 가지 말라고 말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사흘 뒤 신문에는 내가 가려던 지름길에서 「후크」단에게 네 사람이 피살된 기사가 실렸었다). 이 「후크」단이란 태평양전쟁 때에는 항일 「게릴라」였는데 전쟁 후에는 좌파로 기울어져 반정부 무력 항쟁을 일삼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이 나라 서울에서 북쪽으로 2백여리 떨어져 있는 「아라얏」산 속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데 농작물을 거둬들일 때에는 내려와서 버젓이 마을 사람을 시켜 식량을 약탈해 간다는 것.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렇다할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운전사나 손님들의 만류를 듣지 않고 만용을 부렸더라면 위험한 일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하긴 여행이란 이런 「드릴」이 있는 아슬아슬한 고비를 겪어야 하는 법인데 딴 길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 「바탄」반도는 격전지로서 『죽음의 행진』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버스」에는 마침 「필리핀」의 전쟁사를 잘 아는 여객이 있어서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바탄」격전지에서 눈에 띄는 것은 파란 참대 숲과 한가로이 노니는 물소들로 이루어진 평화적인 정경일 뿐 조금도 옛 싸움터다운 느낌이 나지 않았다.
이 「바탄」에는 애절한 전쟁 일화가 있다. 1941년, 3주만에 「마닐라」를 점령한 일본군은 다시 「바탄」반도와 「마닐라」만 어귀에 자리잡은 「코레히도르」요새에 있는 「맥아더」원수 지휘하의 비·미 연합군을 공격했을 때 여기서 저 유명한 『다시 돌아오리라(I shall return)』는 명언이 나왔고 아울러 세계 전쟁사의 잔학상을 차지하는 「죽음의 행진」이란 말이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격전 끝에 5만여명의 미군이 포로로 잡혔는데 북쪽의 「타를라크」란 곳까지 4백50리나 되는 무더운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다. 식량과 물이 부족하여 낙오자가 많이 나왔으나 일본군은 이 낙오자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그대로 길가에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이 3년 후에는 반격해 온 연합군에 못 이겨 이번엔 일본군의 『죽음의 도주의 길』이 되었던 것이다. [김찬삼 여행기…<필리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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