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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식의 똑똑 클래식] 무덤 두 개인 쇼팽 심장은 조국에 묻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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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은 39년의 생에 단 두 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고 한 번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 여섯 살이던 1836년 드레스덴에서 고향인 바르샤바 시절 사귀던 여자친구 마리아 보진스키를 다시 만나 이듬 해에 약혼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반대로 끝내 파혼하고 만다. 그 이유는 쇼팽의 변변하지 못한 신분과 부족한 재산, 그리고 폐결핵이었다.

쇼팽의 사후에 공개된 그의 유품 가운데 ‘나의 슬픔’이라는 글이 쓰여진 낡은 봉투가 하나 발견됐는데 그 속에서는 마리아 보진스키와 그 어머니로부터 받은 이별의 편지가 나왔다. 실연을 앞두고 자신의 집에서 연주했던 곡의 악보에 ‘이별의 왈츠 (Op.69-1)’라는 이름을 붙여 소중히 간직했던 마리아 보진스키가 쇼팽이 죽은 후 공개한 이 곡은 슬픈 제목과는 달리 쇼팽의 사랑이 담긴 밝고 매력적인 곡이다.

그 무렵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해 리스트의 소개로 운명의 여자를 만나게 되니 그녀가 바로 여류문학가인 6년 연상의 조르주 상드였고 그들의 사랑은 10년간 지속된다. 지병으로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쇼팽의 병을 모성애적 사랑으로 돌보았던 조르주 상드는 남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며 연하의 애인들을 수없이 거느리면서도 자녀들을 돌보고 정원 가꾸기와 바느질, 부엌일도 즐기는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였다.

“그는 음악가다. 오직 음악가다. 그의 생각은 음악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그는 극도로 예민하고 섬세하며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상투적인 틀 안에만 갇혀 있다.” 1849년 10월. 파리의 수많은 여인들이 오열하며 쇼팽의 시신을 부둥켜 안았지만 조르주 상드는 끝내 장례식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쇼팽의 아버지는 프랑스 출신으로 폴란드 바르샤바 육군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어머니는 폴란드 출신이었다. 프랑스 출신임에도 러시아와 전쟁이 났을 때 폴란드 군인으로 나서 싸웠던 아버지의 폴란드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나이 스물에 모국을 떠나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조국인 폴란드를 다시 보지 못한 쇼팽은 자신의 심장을 조국인 폴란드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프랑스 마들렌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그의 몸은 그가 폴란드를 떠나올 때부터 소중히 간직했던 한 줌의 흙과 함께 파리의 페르 라제 묘지에 묻혔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고향으로 옮겨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에 묻혔다.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으로 머리를 둔다’하여 이를 사자성어로 수구지심(首丘之心)이라 하는데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고향에 묻는 심정을 적절히 표현할만한 사자성어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김근식 음악카페 더 클래식 대표 041-551-5003

cafe.daum.net/the 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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