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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만의 고사족-김찬삼 여행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의 화물선 「워성턴·베어」호는 「오끼나와」에 3일간 머무른다음 대만으로 향했다. 바다빛은 검푸르고 밤부터는 바람이 몹시 일고 배는 전후좌우로 흔들리니 방안의 짐은 풍비박산이 되어 홑어졌다. 성난 동지나해였다.
다음날 상오9시쯤 대만북단 기륭항에 들어섰다. 부두에는 『대만건설, 반공대륙』이란 표어가 뚜렷이 보였다. 부두의 작은 여사에 짐을 풀었다. 「컬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닿았을때 해변의 모래에 「키스」했다는 얘기에 중학교때는 웃었지만 흔들리지않는 육지의 고마움을 새삼느꼈다.
그런데 약 3백년전 고지도에는 육지에서 완전히 분리된 섬으로 표시됐던 기강은 지반의 융기작용으로 본도와 연결되었다. 기륭은 일본이 점유했을때 부두시설을 했는데 오늘날 외국무역의 반이상을 취급하고 있으며 대북의 해상현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내리는 항로」의 별명처럼 연중 비가 많고 습도가 높다.
바다에 질린 사공이 산으로 가듯, 휴식도 겸해서 대북 남쪽 27·2㎞에 있는 산지원주민 고사족의 거주지이며 온천이 있는 오래(우라이)에 갔다.
마침 일요일이라 많은 소풍객이 왔다. 젊은 남녀들의 「피크닉」이 대성황이었다. 그러나 남녀노소없이 우리의 소풍에서처럼 술싸움이나 고성방가는 없었다. 그저 순박하게 자연을 즐기는 것이었다.
일인들은 고사족을 한곳에 안착토록 했으며 『만족』이라 불렀고 그 집을 『만사』라 했지만, 고사족은 일인에 대한 민족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날 정부는 그들을 고산족, 산지동포, 산포라고 부르고 있는데 어감이 훨씬 부드럽다. 이들은 정부에서 따뜻한 원조를 받고 있으며 세금면세에 사업자금도 저리로 융자받고 있다.
고사족은 대만산맥을 중심하여 산지에 분포하고 있는 「다이알」족, 아미족, 「아야얕」족등 30만에 이른다. 이들은 차츰 고립과 배타성을 버리고 평지로 내려오는 수가 늘어가고 있다. 생활수준은 많이 높아갔지만 아직 어려운 사람이 많다. 산록 평평한곳에 고구마를 심고 삼묘목, 참나무 버섯등을 재배하고있다.
그러나 이같은 원시경작보다는 관광지에 나아가 국내외 관광객을 상대로 돈벌이에 전념한다. 마을의 17∼18세의 예쁜 소녀들은 그들 고유의 원색의상을 입고 있다가 손님들과 같이 사진을 찍어주고는 삼원(30원)씩 받거나 10여명의 처녀들이 추는 「산놀이춤」을 춘다.
이춤은 옆으로 뉜 절구통을 긴 절굿공이로 두드려서 나는 쿵쿵소리에 맞추어 자기들의 산생활을 엮는다. 일정한 양식은 없으며 구전의 노래를 붙인다. 『산의 하모니카』 또는 『사랑의 속삭임』이라는 것은 피리같은 것으로 속이 빈 한쪽을 막고 줄을 퉁겨 핑핑소리를 내며 여기 맞춰 춤을 춘다.
이것은 처녀가 사랑을 호소할 때 젊은 상대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불고 둘이 의사가 맞으면 신목의 잎 채찍으로 엉덩이를 맞는다. 그들은 목배로 술을 담아 같이 마시면 부부가 된다는 것이다. 8마당으로 된 30분간의 아주 정열적인 춤이었다.
끝날때는 좌중의 손님들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권한다. 눈이 큰 예쁜처녀가 손을 끈다. 산에서 자란 냄새가 그대로 풍겨온다. 옷은 관광용 효과를 위해 「디자인」됐고, 눈에는 눈썹을 붙이고 화장을 짙게 한것이 불만이었다.
여기서 결혼식 피로연을 보았다. 촌장의 딸과 함께 갔는데 중산당이란 공회당에 2백50명가량의 손님이 7, 8명씩 둥근상에 둘러앉았다. 단위에는 양가의 대표들이 앉고 익살스런 사회자가 있다. 신랑신부가 들어오면 일어서서 박수로 맞는다.
이어 주연이 시작되는데 술은 권하되 잔은 바꾸지 않는다. 주연이 반넘어 진행됐을 때 신부어머니가 두 사람을 인도하고 상마다 돌면서 손님들에 각별히 인사한다. 조금있다가 신랑어머니도 인사를 하고 끝날때는 입구에서 둘이 인사를 드린다. 신랑은 양복을 입었고, 신부는 중국옷을 입었다. 양풍이 여기도 밀려왔는지 연회중에 줄곧 나와 노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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