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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수상작가 후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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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것은 반가운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스웨덴·아카데미」의「노벨」상 위원회는 70년 도 문학수상후보로 한국 작가의 추천을 의뢰해 왔다. 누구를 어떤 근거로 선정할지 자못 궁금하다.
생각하기 나름으론「노벨」문학상 중엔 타작(타작)도 있었다. 가까이는 68년도 수상작가인 「가와바다·야스나리」씨의 경우, 일본에선 더러 실소도 자아냈다.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데에도 있다. 만일「타작」이 추천되었을 때, 한국문학에 대한 저쪽의 실망감을 무엇으로 보상할지 말이다. 반대로 수작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도 의문이다. 한글 체 그대로 내밀 수는 없다. 과연 누가 한 경지를 이룬 문사와 호흡으로 우리의 작품을 번역할지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쪽의 준비가 너무 허술했던 것도 같다. 문학의 이상을「노벨」상 따위에 떠맡길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제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벌써 우리문학의 해외진출을 누군가가 손을 댔어야 옳다.
우리문학이 지중해를 건너기엔 몇 가지 난관이 있다. 우선 정신의 양식이 그것이다. 서구인과 한국인의 정신가치에서 오는「갭」말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생활양식의 문제이다. 그것은 어떤 상상의 수용력과도 관계가 있다. 또한 서양인은 전통적으로 모든 구조의식을 기독교정신에서 구하려 한다. 철학적 요소와도 관계가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고「노벨」이 반드시 『서양적인 가치』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가와바다·야스나리」씨의 수상작은 일본인의 애절한「로맨스」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것을 금과옥조로 삼는 것은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아무튼 그들의 평가를 받은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문제는 평정의 기준이 반드시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축적한 가치에도 있다. 한국문학이 가장 한국적일 때 오히려 이것이 점수를 받을지도 모른다. 결국은 우리 자신의 문제로 돌아온다.
30여 년 전, 이광수가 갈파한 독설이 문득 생각난다. 문사란 ①학교를 졸업하지 말 것 ②애연·폭음할 것 ③반드시 연애를 담 할 것, ④두발과 의관을 야릇이 할 것, ⑤정신쇠약·빈혈성 용모를 가질 것 ⑥불규칙·불합리한 생활을 할 것.
상고 적 안일주의에 찬물을 끼얹는 「패러독스」라고나 할까. 오늘날, 그런 작가는 없다. 우선 안정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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