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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중학 무시험제 국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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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0년대 후반기에 들어 실시된 중학무시험진학 제는 해방 후 20여 년 동안 악순환을 계속해 오던 입시제도 사는 물론 교육사상 획기적인 혁명적 조치였다.
68년 7월15일 문교부는 69학년도부터 3년 동안 연차적으로 전국의 남녀중학교 입학시험을 전폐하고 학교군제를 신설하여 추첨으로 입학을 결정하는「중학교입학제도개선책」을 확정 발표했다.
당시의 권오병 문교부장관은 이 제도개혁을 발표하면서「서로 이주가 엇갈리고 일시적인 혼란은 가져오겠지만 국가백년대계를 위해서는 폐단이 많은 중학교입시를 없애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대신 입시경쟁의 시점을 고등학교로 옮겨 선의의 경쟁을 시키기로 했다』고 제도변환 이유를 설명했다.
입시제도는 문교책임자가 갈릴 때마다 또는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시정되어 학생은 물론 학부모까지 우왕좌왕하게 해 왔다.
이렇게 편의적으로 변환돼 온 입시제도는 장기적인 전망에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졸속한 판단으로 고쳐진 것이기 때문에 제도개혁에 따른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또는 심리적인 여러 조건이나 결정요인의 고민 없이 기술적인 문제로만 다루어져 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입시제도 가운데도 가장 중심이 되는 중학입시제도는 45년부터 50년까지 6년간 학교장책임아래 치르는 단독관리 제였고 51년부터 53년까지의 동란 기에는 국가연합고시 제, 54년부터 61년까지는 유·무시험제와 연합출제제도를 병용했으며 62년에는 다시 국가연합고시 제, 다음해인 63년부터 65년까지는 시-도 공동출제 제, 66년에는 공동·단독 병용, 67년과 68년에는 문제은행 식에 따른 시-도 공동출제제로 바뀌어 왔고 69년 도부터 연차적인 무시험제로 확정된 것이다.
「교육혁명」「폭탄선언」등으로 불린 이른바 권오병「플랜」을 발표하면서 권 장관은 이 제도가 지금까지 자주 바뀌어 온 제도와는 달리 항구성을 띤 것임을 강조했다.
무시험제와 함께 문교부는 학교 차를 없애기 위해 세칭 일류중학교를 연차적으로 폐쇄키로 했으며 그 대신 동일구내 고등학교 취용 능력을 폐쇄된 중학교의 수용능력만큼 늘리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문교부는 무시험진학에 따른 지원자전원의 취용을 목표로 70년 2월까지 1천2백7개 학급을 신·증설하고 71년2월까지 1천7백66개 학급을 신·증설키로 했다.
무시험제실시이유로 문교부는 ①국민학교 교육을 정상화하고 아동의 건전한 성장발달과 학부모의 과중한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②학교 차를 해소하며 ③입시경쟁의 시점을 비교적 유년기를 벗어난 고교로 옮기는 등 장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중학입시지옥은 국민학교 교육을 입시위주교육으로 전락시켰고 입시에서 떨어진 아동들의 재교육과 선도문제, 재수생들이 타관이나 과외공부로 소비하는 정력과 시간과 건강의 소모 등은 측정할 수 없이 막대했었다.
이와 곁들여 학교 차로 인한 일류·이류교의 등장과 학문을 중요시하는 사회풍조는 아동을 떠난 부모의 신경전.「치맛바람」과「뒷문입학」등을 낳아 사회발전을 해치는 암적 존재로 되었다.
국민은 이런 악순환 속에서 어떤 혁명적 조치를 기대했고 무시험제는 가장 이 기대에 부응된 것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른바 권오병「플랜」은 당초원칙에 따라 큰 잡음 없이 진행되고 있으나 시행착오, 장관의 갱질 등 이유로 다소 변질을 가져왔다.
70학년도 실시 예정이었던 6개 도시가 10개 도시로 늘어났고 일류교의 완전 폐쇄방침은 폐 소와 교 명 변경 등 두 가지를 병용키로 했다.
70년대로 넘어가면서 이 제도가 어떠한 변질을 가져올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이 제도의 문제점들, 즉 교육기회의 자유로운 선택권 박탈, 통학거리상의 문제, 교원·시설의 평준화 등 학교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부 취입이 없어짐에 따라 생기는 잡부금징수, 개인차가 심한 학생집단의 교육 및 생활지도의 이점 등 해결할 과제는 많이 남아 있다. <이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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