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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일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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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방탄내각」이라고 불리던 최두선「팀」을 이어, 정일권씨가 제3공화국의 두번째 국무총리에 취임한 것은 64년5월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데모」등 혼란한 정치 상황아래서 정 내각은 1년간의 「기한부 수습선언」을 하면서「돌격내각」으로 출발한 것이다.
이런 과감한 시정 자세는 큰 차질 없이 들어맞아 65년 한일회담 체결, 66년 월남파병 실현 등 첩첩한 국가적 난제들을 해결하면서 정 내각은 69년말로 5년6개월이 넘는 정부사상 최장수를 기록했지만 그 면모는 출발 당시와는 전혀 달라졌다. 정 총리(당시 외무장관 겸임)만이 그대로 있을 뿐, 그 동안 13차의 개각으로 45번이나 장관 자리가 바뀌어 출발 당시의 장관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서일교 법제처장이 총무처장관으로, 김윤기 교통이 무임소로 현 내각에 자리를 옮기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돌격내각」은 이른바「중화내각」으로 체질 변화를 했다. 격동의 전반기에 비겨 그 후반은 비교적 정치적 안정이 이룩된 탓이기도 하지만 박 대통령의 「의욕」을 뒤쫓다보면 정치적으로는「중화」가 최선의 길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나는 정치를 모르며 정치에 관심도 없다. 나는 행정가이지 정치가는 아니다』(67년3월 「워싱턴」「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의 연설)
강력한 대통령 밑에서의 총리의 좌표를 그는 「중화」에서 찾았으며 「행정가」라는 틀 속에 안주했다.
취임 한달도 채 안되어 정 내각은 ,6·3사태로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 뒤에도 위수령 발동, 대학 휴업령 등 강경책을 썼고, 박 대통령의 담화를 받아 정 총리는『정치 교수, 정치 학생들을 모조리 학원 밖으로 축출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7개 방침을 내놓은 적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강경한 조치는 물론 정 총리가 이니시어티브를 쥐고 한 것은 아니었으며 박 대통령의 결정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개헌에 대한 야당의 정치적 공세를 막는 일도 그의 중요한 임무였다. 취임 후 정 총리는 1백49회나 국회에 출석, 주로 대정부 질문 공격의 화살을 막는 방패역을 해냈다.
66년6월 박한상 의원 「테러」사건에 대한 인책 공세로 처음으로 야당의 해임 건의를 받았으며 66년9월엔 국회 뇌물 사건으로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정치의 회오리바람 속에 말려들기도 했다.
64년12월23일 정 총리는 공화당에 입당했다. 집권 당내의 역학 관계에서 볼 때 그의 체중은 표면에 그다지 노출되지 않았으나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간혹 당파의 불협화음이 일어 대통령의 자문에 응할 때도 자기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기를 꺼려 『조심스런 태도』로 일관해왔다고들 한다.
『행정에 관해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헌법89조)하며 대통령 유고시 권한 대행을 하는 막중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정 총리가 독자적인 권력의 영역을 「사양」한 인상을 주어 온 것은 이러한 신중성 탓이라고 할만하다. 정치와 행정이 보다 밀접한 함수 관계를 맺어 가는 현대 국가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국무총리의 정치권외로의 지향성은 분명히 60년대 한국 정치의 일면임이 분명하다.
4성 장군에까지 오른 22년의 군인 생활,「터키」대사에서 주미 대사를 거쳐 국무총리에 이르는 동안에 넓혀진「발」과 정치적으로 상처가 없는 것으로 해서 그의 잠재적인 힘은 웬만큼 평가받고 있다. 다만 이 힘이 언젠가는 현재적인 것으로 전위될지 끝내 정가에서 일컫는 대로 「얼굴」만의 행정가로 남을는지는 풀리지 않은 채 해를 넘기는 것이다.<윤기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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