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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미국과의 대담한 승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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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영기
논설위원
JTBC 뉴스9 앵커

6·25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됐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해 10월 1일 조인됐습니다. 정전협정은 63개 항목으로 이뤄졌습니다. 제60항은 정전(停戰) 3개월 이내에 미국+북한+중국이 정치회담을 열어 ‘한국에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문제를 협의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협정 문안대로 일이 진행됐다면 53년 10월 말 미군은 한국에서 모두 떠났을지 모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으로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정전이었습니다.

 김일성은 미군 없는 한국군쯤은 언제라도 날려버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3만7000명의 미군이 사망한 이 땅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고요. 미군 철수라는 점에선 김일성과 아이젠하워의 이해관계가 기묘하게 일치한 셈이죠. 정전협상은 이런 이해관계 위에서 진행됐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을 상대로 대담한 승부를 걸었습니다. 그는 정전협상을 줄기차게 반대했습니다. 끝내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만일 이승만이 협정에 서명했다면 문제의 제60항 때문에 미군을 붙들어둘 명분을 잃었을 겁니다. 미국을 상대로 던진 절정의 승부수는 6월 18일 자정에 단행한 반공포로 석방 사건입니다. 미국+북한+중국 간 정전협상의 최대 쟁점이 포로 교환 문제였는데 이 지점에 폭탄을 터뜨린 겁니다. 이승만은 미군의 작전지휘권 바깥에 있는 한국의 헌병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국 헌병대는 포로수용소를 지키던 미군 초병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2만7000명을 탈출시켰습니다. 이 소식에 놀라 아침에 면도하던 처칠 영국 총리는 얼굴을 베었고,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곤히 잠자던 아이젠하워를 깨웠다는 그 사건입니다. 이승만은 한국의 단독 행동으로 얼마든지 정전체제를 깨뜨릴 수 있다는 점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승만의 승부수는 자칫 자기 무덤을 팔 뻔했습니다. 아이젠하워가 한국의 골칫덩어리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쿠데타 계획을 검토했기 때문입니다. 1975년에 해제된 미국 정부 기밀문건에 따르면 “1953년 아이젠하워와 덜레스, 합참의 각 참모총장들은 이승만을 체포하고 남한을 다시 미 군정하에 두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 중이었다”고 써 있습니다(『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106쪽).

 당시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의 지지는 절대적이었고, 군과 집권세력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쿠데타 계획은 대안세력이 없어 무산됐다고 합니다.

 대신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한·미동맹(同盟)을 맺기로 했습니다. 이승만도 아이젠하워에게 더 이상 정전협상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인된 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이죠. 이 조약에 따라 미군은 한국에 계속 주둔하게 됐습니다. 이 대통령은 미국에 ①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②장기간 경제원조도 추가로 받아냈습니다.

 정전협정으로 미군 철수를 노렸던 김일성은 의표를 찔렸습니다. 이승만은 동맹조약을 맺음으로써 불안한 정전협정을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정전으로 ‘전쟁 중단’은 얻었지만 동맹으로 ‘미군 발 빼기’엔 실패했습니다. 한국을 김일성 공산세력에 넘겨줄 수 없다는 이승만의 집념과 승부수는 통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유엔군 사령관인 클라크 장군이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평화를 얻는 게 더 어려웠다. 적군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더 힘들었다”고 했겠습니까.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북한은 정전 60주년을 자기들 말로 전승절이라고 부르더군요. 전승절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뜻인데,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국가가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은 동맹 60주년을 일부에서 무슨 자주성이 없는 사대주의처럼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런 감상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분명한 건 우리의 국가는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실패한 전체주의 국가와 성공한 민주 번영 국가의 출발은 김일성과 이승만에게서 갈렸습니다. 정전과 동맹의 60년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승만이 친미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위대한 전략가라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전영기 논설위원·JTBC 뉴스9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