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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모래언덕 넘으니 달이 뜨네, 마치 희망처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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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호 24면

G30 롄훠 고속공로를 따라 달리는 경상북도 실크로드 2차 탐험대. 이 도로는 동쪽 장쑤성 롄윈강에서 서쪽 신장위구르 훠얼거쓰까지 4243㎞에 걸쳐 있다. 사진작가 정철훈

중국의 고속도로는 ‘궈다오(國道)’의 머리 글자를 따서 G자와 숫자를 결합해 표기한다. 남북 방향은 홀수로, 동서 방향은 짝수로 표기하며 북쪽과 동쪽의 도로부터 숫자가 높아지는 건 우리나 마찬가지다. 한 자리 숫자는 수도 베이징에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도로들이고, 90번대는 지역 순환선들이다. 실크로드 탐험대 앞에 놓인 길은 G30 롄훠 고속공로, 즉 북쪽에서 세 번째 구역쯤에 있는 도로다.

실크로드 대장정<2부> ①변방의 시작, 하서주랑

동쪽 장쑤성의 롄윈강(連雲港)에서 시작해 카자흐스탄과의 접경 훠얼거쓰(霍尔果斯)에 닿는 이 도로는 란저우(蘭州)를 지나면서부터는 풍광이 부쩍 달라진다. 꽃 내음 물씬 풍기는 이름과 달리 란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대기오염이 심하기로 유명하다. 마치 도시를 완전히 탈바꿈하는 듯 곳곳에 타워크레인들이 서 있는 시내의 정경 위로 무거운 연무들이 누렇게 끼어 있다. 하지만 란저우만 지나면 지금까지 보던 중국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기분이 든다. 그 즈음이면 자동차는 길이 약 900㎞, 폭 수㎞에서 100㎞에 이르는 좁고 긴 평지인 하서주랑(河西走廊)으로 접어든 것이다.

중국 둔황 명사산 모래언덕에 보름을 이틀 앞둔 둥근 달이 떠올랐다.

하서주랑은 황허의 서쪽에 위치한, 복도처럼 생긴 길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복도처럼 좁다는 것은 방어하기에 좋다는 뜻이다. 기원전 110년 무렵 한나라 무제가 우웨이(武威), 장예(張掖), 주취안(酒泉), 둔황의 사군을 개척한 이래 이 길은 서역으로 나가는 교역로인 동시에 유목민족의 침략을 방어하는 길목이었다. 지금은 광대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서쪽에 있으니 하서주랑을 벗어난다고 해도 중국 땅이지만, 보이는 풍경이 붉은 민둥산과 황량한 벌판, 들이라 변방으로 나간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하서주랑 벗어나자 황량한 변방 시작
천 년 전 몽골의 칭기즈칸에 의해 소멸된 나라인 서하(西夏)의 남쪽 경계를 따라가는 길이라는 점에서 하서주랑은 더욱 흥미롭다. 내가 이 세상에 서하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 덕분이었다. 탕구트족의 나라 서하가 배경인 이 소설은 1026년 송(宋)나라 수도인 카이펑(開封)에 진사시험을 치러 갔다가 시험장에서 잠드는 바람에 보기 좋게 낙방한 선비 조행덕이 시장에서 벌거벗은 채 죽음을 기다리는 서하 여인을 만나면서 시작한다. 일본에서 머나먼 대륙을 상상하면서 쓴 이 소설은 하서주랑이라는 교역과 방어의 길을 사랑과 전쟁이라는 이야기의 형태로 변형했다.

변형의 원리는 간단하다. 길이 열리면 사랑이고 길이 닫히면 전쟁이다. 서하 여인이 남기고 간 서하 문자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순간 사랑이 시작되고, 다른 종교를 말살하려고 할 때 전쟁이 일어난다. 소설에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조행덕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서하는 둔황을 사막의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역사에서는 다시 칭기즈칸의 군대가 서하를 멸절시킨다. G30 고속공로에서 잠시 벗어나 닝샤 후이족 자치구(寧夏 回族 自治區)를 지날 때 나는 거기에서 서하의 옛 수도가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서하를 세운 탕쿠트 족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하와의 마지막 전쟁에서 칭기즈칸이 철저한 민족 살육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변경의 황무지에서는 낙타 똥처럼 흔하다. 하서주랑의 가장 좁은 곳이자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자위관(嘉峪關)을 지나오면 가오창(高昌) 고성, 자오허(交河) 고성 등 유목 민족과 정주 민족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다가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진 작은 오아시스 국가의 성터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거대한 불상을 모셨을 대불사도, 서역 상인들로 북적댔을 중앙대가의 흔적도 모두 흙 무더기로만 남았다. 그 도시들에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또 더 나은 내일을 상상했던 사람들도, 군사상의 목적으로,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그 도시들을 파괴한 사람들도 이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전한 것은 수은주를 섭씨 40도 가까이 끌어올리는 뜨거운 여름 햇살뿐이다.

그런 폐허의 모퉁이를 돌 때 이따금 뱀 껍질로 만든 위구르 기타 르와프 선율이 들려올 때가 있다. 관광객을 위해 위구르 노인이 치는, 가볍고도 높은 기타 소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노라면 그 음률은 이윽고 사라지고 폐허의 고성에는 침묵이 찾아온다. 투르판을 지날 때 이런 생각을 했다. 화염산을 처음 본다면 누구나 탄성을 지를 것이라고. 여기는 지옥처럼 뜨거운 곳이다.

그 탄성은 투르판의 지하 관개수로인 카레즈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다시 터져나올 것이다.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을 투르판까지 끌어오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수로를 판 길이가 도합 5000㎞에 달한다니, 지옥에서도 인간은 살아남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감동도 잠시, 모든 것은 먼지 속에서 나와 다시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고, 옛 성터에서 듣는 르와프 선율은 내게 말한다.

이런 혹독한 삶의 조건과 모든 것을 무화(無化)시키는 광활한 시공간 앞에서 벌거벗은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맞설 것인가? 거기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둔황 명사산 동쪽 막고굴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 초 막고굴의 16호 석굴 입구의 한쪽 벽이 무너지면서 왕원록이 9세기에 활약한 하서(河西) 출신의 고승 홍변(弘辨)의 석상과 함께 산더미처럼 쌓인 고대 문헌을 발견한 일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근본적으로 삶은 고통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불교 신앙은 시작한다. 그 원인은 집착이니 집착을 버리는 일이 바로 불교 수행이다. 사막이라는 혹독한 자연 조건은 물론이거니와 끊임없는 전쟁의 공포에 시달렸던 오아시스 국가의 사람들에게 삶은 고통이라는 명제는 따져볼 것도 없는 진실이었으리라.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이 바로 막고굴, 무려 550개에 달하는 석굴로 표현됐다.

그 고대 문헌들 속에 한 행이 27~30자, 총 227행으로 이뤄진 여행기가 있었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둔황에서 발견한 1300여 년 전의 이 여행기는, 당시에는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간 잔간(殘簡)사본이라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간의 연구를 통해 신라 고승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게 밝혀졌다. 혜초는 719년 열여섯 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들어가 광저우에서 인도 밀교승인 금강지를 만나 제자가 됐다. 723년 혜초가 바닷길을 따라 인도로 가게 된 것은 스승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약 4년 동안 인도와 서역의 여러 나라를 돌아본 뒤 727년 11월 상순에 당시 안서도호부의 소재지인 지금의 쿠차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여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책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혜초도 힘들어 눈물 뿌린 호밀국
그 여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는 호밀국을 지나면서 혜초가 남긴, ‘평생 눈물을 훔쳐본 적 없는 나건만/오늘만은 하염없는 눈물 뿌리는구나’로 끝나는 오언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혜초가 이 길을 가야만 했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믿는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투르판 사람들이 뜨거운 황무지 아래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 몇 천㎞의 수로를 파낸 것이 그러하듯이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믿는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무정한 시공간에 맨몸으로 맞선다. 그건 때로 4년에 걸친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 되기도 하고, 몇 천㎞에 달하는 지하수로를 파내는 대역사가 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는다.

경전들이 발견된 곳이라고 해서 지금은 장경동이라는 별칭이 붙은 17호 작은 석굴을 들여다보며 나는 열여섯 살에 바다를 건너간 혜초가 입증하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했다. 어떤 진실이든 그게 진짜 진실이라면 봄에 피는 꽃처럼 단순하리라. 봄이 되면 꽃이 핀다. 이게 바로 우리가 입증해야만 하는 진실이다. 그 단순한 진실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겨울의 추위를 견디는 것이니까. 혜초 역시 인간의 삶은 고통을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믿었을 것이다. 그 고통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에서 쓰지 않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늘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둔황 명사산 모래언덕 안에 형성된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인 월아천에 갔을 때는 베이징 시간을 쓰는 탓에 저녁 아홉 시나 되어야 찾아오는 일몰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서둘러 모래언덕을 밟고 오르노라니 한 발을 내디디면 반 발이 밀려나는 형국이었다. 밟으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 그게 바로 모래의 속성이었다. 그렇다면 고통의 바다라는 것, 그건 인생의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당장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는 것. 그럼에도 사막을 건너 머나먼 나라까지 여행한다는 것. 그건 어째서일까? 흔한 말처럼 희망 때문일까?

하지만 명사산 모래언덕에서 내려온 뒤에야 나는 그들이 희망을 향해서 나아간 것이 아니라는 걸 바로 깨닫는다. 이제 칠월의 태양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넘어갔다. 저녁이 찾아오자 한결 시원해진 바람이 불어 왔다. 이런 저녁이 있으니 둔황의 더위는 견딜 만하다. 모래언덕을 모두 내려와서 문득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느라 고개를 돌렸더니 노란 언덕 위 짙푸른 저녁 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크고 하얀 달. 그 달처럼 희망은 앞에 있어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남겨놓는 것이겠다. 이 혹독한 사막에 남은 카레즈며, 고성이며, 『왕오천축국전』이 그러하듯이.



김연수 요즘 뜨는 작가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꾿빠이, 이상』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의 소설을 출간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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