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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년] 백선엽 장군에게 듣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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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23일 용산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6·25전쟁 영웅의 흉상 옆에서 60년 전을 회상하고 있다. “전쟁을 잊는 자에게는 다시 전쟁이 찾아온다”고 그는 강조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총성은 멈췄으나 다른 전쟁이 대한민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이후의 이야기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의 김일성이 벌인 기습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그를 사전에 막으려면 다른 무엇보다 대한민국 자체가 강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6·25 남침 전쟁은 단락을 맺었으나 미증유의 동족상잔이라는 참화를 겪은 대한민국은 스스로 강해지는 길을 향해 시급히 움직여야 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은 그 전의 3년 전쟁에 못지않은 새로운 전쟁의 서막과 다름이 없었다.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6·25전쟁의 중요한 국면에서 탁월한 야전 지휘로 한국과 미국에서 전쟁 영웅으로 꼽히고 있는 백선엽(93) 예비역 대장을 만났다. 그는 공산 측과의 휴전회담 첫 한국 대표였고, 그 이후로도 주요 전투의 지휘관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으로 정전협정 체결까지의 과정을 면밀하게 지켜본 인물이다. ‘한국인은 싸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민족인가’라는 취지의 물음을 먼저 던졌다.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 휴전회담 장소였던 1951년 당시 판문점. [중앙포토]

- 6·25전쟁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잘 모르는 이들이 있다.

 “60여 년 전의 전쟁을 생각할 때 늘 떠오르는 강이 두 개 있다. 낙동강과 압록강이다. 이 두 강은 어떻게 보면 상징이다. 우리 민족의 싸움 방식과 관련해서 말이다. 낙동강은 우리가 김일성 군대에 쫓겨 내려간 강이다. 그리고 압록강은 그 김일성 군대를 마지막으로 몰아내려고 추격전을 펼친 강이다.”

 - 낙동강·압록강이 6·25 전쟁 전반의 양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일본의 침략으로 벌어졌던 421년 전의 임진왜란 때도 비슷했다. 막바지에 몰려도 끝까지 전의(戰意)를 잃지 않으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싸우고 또 싸웠던 강인함이 우리에게 있다. 낙동강은 그 점을 말해준다. 우리는 그 강에서 김일성 군대의 맹렬한 공세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은 채 끝까지 잘 싸웠다. 그러나 국면을 크게 전환해 공세(攻勢)를 거듭하며 김일성 군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압록강에서의 전투는 양상이 달랐다. 우쭐했으며 방심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보낸 30만 명의 중공군이 빈틈없이 매복해 있던 적유령(狄踰嶺) 산맥의 깊은 골짜기들을 그냥 지나쳐 압록강으로 마냥 내달았다.”

 - 전쟁은 미군이 지휘하지 않았나.

 “물론이다. 지휘는 미군이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선의 끝인 전초(前哨)에 서서 적의 동향을 파악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당시 전선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던 한국군의 책임이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조국 통일이라는 거대한 사명감과 명분에 압록강까지 내달은 국군 장병의 용기는 대단했으나, 3개 사단으로 이뤄진 2군단이 모두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온 점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 이후로 벌어진 전투에서도 방심하며 우쭐거리다 적에게 패배한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1950년 말의 ‘압록강’은 매우 상징적이다.”

1951년 판문점 유엔군 캠프에서 백선엽 장군(당시 1군단장·오른쪽)이 유엔군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 정전을 맞을 때의 심정은 어땠나.

 “협정이 맺어지는 날 나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착잡한 심정으로 소식을 기다렸다. 그 뒤에는 겨를이 없었다. ‘다른 의미의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각오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이 대통령을 비롯해 국군 수뇌부, 미군 지휘부 등의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언제라도 저들이 다시 도발할지 모른다는 점이 우선 큰 걱정거리였다.”

 - 가장 시급했던 과제는 무엇이었나.

 “나는 정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다가 1953년 말에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으로부터 한국군 최초의 1야전군 사령관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병력 40만 명을 거느리고 155마일 휴전선을 국군 단독으로 방어하는 개념의 군대였다. 테일러 대장은 ‘비록 육군참모총장에 비해 직급은 낮으나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주저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군은 곧 철수할 계획이었고, 그에 따라 모든 전선을 한국군이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 군대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계기였다.

 “그렇다. 전쟁을 치르면서 대한민국 군대는 전투력을 제대로 보유한 10개 사단으로 성장했고, 내가 3년 반 동안 1야전군을 이끌고 휴전선 단독 방어에 나서면서 다시 10개 전투 사단을 늘렸다. 아울러 후방에 예비사단 10개가 들어섰다. 70만 강병으로 발돋움하는 계기였으며, 이 과정에서 미군의 전투장비 지원이 큰 힘이 됐다. 병력 40만 명의 1야전군이 자리를 잡아 의정부~판문점 지역을 제외한 모든 전선이 한국군의 직접적인 방어 지역으로 변했다.”

 - 당시 전선 상황은 어땠나.

 “지금 같은 철책은 없었다. 그곳이 비무장지대(DMZ)임을 알리는 팻말만 있었다. 다행히도 김일성 군대의 도발은 거의 없었다. 전쟁 동안 김일성 군대는 초반 3개월 공세를 펼친 뒤 국군과 연합군의 반격에 밀리면서 완전히 무너진 수준이었다. 1950년대 후반까지 많은 수의 중공군이 북한에 남아 있었으나 이들 역시 미군의 존재가 두려워 도발하지 못했다.”

 - 군대 훈련은 어떻게 했나.

 “브루스 클라크와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등 미군의 군사훈련 분야 최고 권위자들이 우리를 도왔다. 나는 미군의 각종 훈련 교범을 입수한 뒤 이를 번역해 타자로 치게 해서 문서로 남겼다. 우리의 훈련 매뉴얼로 삼기 위해서였다. 돌이켜보면 6·25는 준비 없이 맞은 전쟁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피해는 참담했다. 그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미군의 교범에 따라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군대는 고된 훈련을 거쳐 유사시에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서야 하는 존재다. 사단과 사단 대항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실탄 훈련을 펼치면서 우리는 적의 도발에 대비했다.”

1953년 7월 27일 마크 클라크 당시 유엔군사령관(앞줄 왼쪽에서 둘째)이 휴전협정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은.

 “마찬가지였다. 이 대통령은 고령(高齡)에도 불구하고 사단 창설식이 열리면 반드시 참석했다. 노구를 이끌고 먼 거리를 이동해 반드시 국군을 격려했다. 대통령은 당시 서울대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더라도 군대가 새로 출범하는 곳에는 꼭 나타났다.”

 - 전후 사회 복구 작업 또한 활발히 펼쳐졌다.

 “미군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미군의 지원으로 전쟁 때 부서진 교량과 학교, 관공서 등을 모두 재건할 수 있었다. 또 미국의 무상지원으로 충주 비료 공장을 세워 식량 증산에 박차를 가했고, 전후 물자 부족을 메우기 위해 역시 미국과 유엔 등의 도움으로 인천 판유리 공장과 문경의 시멘트 공장을 세웠다.”

 - 미군과의 교섭은 어땠나.

 “미군은 매우 합리적인 군대다. 무조건 남을 돕지 않는다. 이치에 들어맞는 논리, 그리고 신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155㎜ 야포와 대(對)전차포 등을 넘겨주는 데에는 선뜻 동의했으나 핵심적인 전력인 전차(戰車)를 넘겨주는 데는 주저했다. 그래도 끊임없는 설득을 통해 결국 미군의 전차 등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 국군의 전후 상황은 어땠나.

 “모든 것이 부족했다고 봐야 한다. 장비와 무기, 급식 등이 턱없이 부족했다. 전체의 80%를 미군에 의존했다고 보면 좋다. 그래도 미군은 한국군의 사정을 감안해 상당한 지원을 해줬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에 유학시킨 한국군 장교 2000명은 한국군 재건에 핵심적인 역량이었다.”

 - 전쟁 전에 비해 국군은 어떻게 달라졌나.

 “3년 동안의 6·25전쟁에서 드러난 국군의 실력은 보잘것없었다. 위기의 벼랑에서 생명을 던지는 용기는 지녔으나 싸움의 방식과 태도에서는 여러 문제점을 보였다. 다시 말하자면 감성적인 싸움을 수행하는 군대였다. 위기에서는 뭉치지만, 잘나갈 때면 방심하는 버릇이 늘 있었다. 모두 튼튼한 조직과 장비, 그리고 교육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에 다가서는 중공군을 보면 도망쳤고, 기습을 받은 뒤에는 흩어져 다시 모이지 못했다. 결국 훈련이 있었느냐와 없었느냐의 차이였다. 그 점을 명심해 국군의 핵심 전력인 1야전군에서는 훈련에 훈련, 다시 훈련을 거듭했다.”

 - 결국 강한 군대로 육성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을 텐데.

 “우리가 부족한 부분을 미군이 메워주면서 훈련을 거듭한 결과 우리는 분명히 강병의 면모를 띠어 갔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군의 정치적 중립이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경무대를 출입하는 군인이 늘어났고, 이승만 대통령 주변의 권력이 또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군이 흔들리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 강병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선은 부국(富國)이다. 나라가 잘살아야 강병을 키울 수 있다. 동양에서 오래 내려온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지침이 바로 그를 말하고 있다. 나라의 살림을 키우는 일, 즉 부국을 이룬 뒤에야 강병을 육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지금도 틀림이 없다. 우리가 우선 잘살아야 한다. 그 뒤에 군대를 강하게 키우는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기반을 마련했어도 군대의 조직원들이 정치적 영향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면 강병은 그저 꿈에 불과할 수 있다.”

 - 미군은 강병의 조건을 모두 지녔나.

 “미군 또한 사람 아닌가. 사람인 이상 그들도 세속의 권력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만났던 미군 지휘관은 대부분 군이 정치에 절대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녔다. 한국군의 초기 성장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전후 국군 전력 증강에 막대한 도움을 줬던 맥스웰 테일러 장군 등은 한국군 지휘관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군은 절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테일러 장군은 나중에 한국말을 익혀 우리말로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그 점을 강조하곤 했다.”

 - 그래서 미군이 강하다는 뜻인가.

 “아울러 철저하게 실리적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6·25전쟁 초반 대한민국이 낙동강 이남에 몰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불독과 같은 사나운 기질의 워커 중장을 지휘관으로 투입했고, 1·4후퇴의 위기에서는 강철과 같이 냉정한 매슈 리지웨이를 보냈다. 소강기에 접어든 시점에는 조직과 편제(編制)에 능한 밴플리트, 휴전 전후의 상황에서는 관리와 시스템 구축에 탁월한 테일러를 투입했다. 원칙에 따른 인재 양성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체계를 갖춘 군대다.”

 - 대한민국은 아직 휴전 상태에 불과하다.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우리는 아직 싸움의 상태에 놓여 있는 국가다. 우리의 적은 아직 수많은 동포를 굶주림과 정치적 핍박에 직면토록 하는 김일성의 후대 공산주의 집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싸움의 상태를 종종 잊는 적이 있다. 마치 곧 압록강에 도달해 민족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를 보인다.”

 - 요즘 북방한계선(NLL)을 두고 시끄럽다.

 “NLL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김일성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고, 해군과 공군력이 절대 부족한 북한이 결국 미군과 유엔의 힘에 밀려 정해진 선이 NLL이다. 김일성한테는 자업자득의 경계선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먼저 도발한 김일성 왕조에게 힘으로 확보한 해상 경계선을 두고 타협의 여지를 보인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싸움의 본질을 외면한다는 얘기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어느새 그 참혹했던 싸움을 잊기 시작했고, 그런 상황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 NLL이 그어지던 당시 상황은 어땠나.

 “나는 미군 군함에 올라타 원산 앞바다의 요도에 여러 차례 갔다. 당시 압도적인 해군력을 자랑하는 미군의 힘에 눌려 북한은 모든 바다에 나서지 못했다. 아군의 전함과 전력은 압록강 하구, 청진 앞바다 등에 수시로 도달했다. 정전과 함께 그들을 모두 북한에 내주고 최소한의 경계선을 그은 게 지금의 NLL이다. 북한은 정전 당시 NLL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전시작전지휘권(전작권)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우리가 강병(强兵)을 이뤘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군대는 방어군 개념이다. 적의 침략에 맞서 나라의 강토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 역량을 집중하는 군대다. 그러나 한반도가 놓인 모든 군사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요소를 모두 충족하는 군대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 부족한 점은 미군이 대행하는 체계다. 1953년 맺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그런 점에서 절대 허물 수 없는 기본 틀이다.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군으로부터 회수하는 사안은 우리가 자주적이냐, 아니냐를 거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메울 수 없는 부분을 미국이라는 절대적인 동맹을 통해 해결하는 측면이 있다. 그 점을 잘 알아야 한다. 한반도의 싸움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매우 복잡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 좀 더 부연한다면.

 “북한을 상대로 하는 싸움은 저들의 도발 가능성을 처음부터 없앤다는 점에서 전쟁 전에 상대를 제압하는 ‘선제(先制)’의 틀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다. 대한민국의 군대는 그런 선제의 틀까지 보유하고 있는 군대는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은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미군과의 강력한 유대는 그래서 필요하다. 적이 전의(戰意)를 아예 갖추지 못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선제가 필요하다. 전시작전권 환수를 아직 거론할 때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과 충돌을 자주 빚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은 중요한 군사적 결정을 두고서는 늘 내게 ‘세계 최강의 미군이 그런다는데, 그냥 내버려 둬’라고 말하곤 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미군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 장군이 본 공산주의자들은 어땠나.

 “틈을 보여주면 곤란한 사람들이다. 우선 기만(欺瞞)과 사술(詐術)에 매우 능하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가장 유념할 게 힘의 우위(優位)를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힘으로 눌러야 협상에서 저들의 획책에 말리지 않는다. 첫 휴전회담의 한국 대표로 나섰을 때도 이 같은 장면들을 목격했다. 단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중공군 대표로 나온 중국 장성은 뭔가 조금 달랐다. 딱딱하고 경색된 북한 회담 대표(남일·이상조·장평산)에 비해 중공군 대표였던 덩화(鄧華)와 셰팡(解方)은 특유의 ‘차이니스 스마일’을 띠며 여유를 보였다. ‘같은 공산주의라고 해도 북한과 중공이 어딘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 김일성에 대한 인상은.

 “그 역시 큰 싸움꾼은 아니다. 전쟁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전쟁의 혹심함을 잘 모르고서 도발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전쟁 초반에 보인 격렬함은 있었으나 국면(局面)을 장기적으로 다룰 줄 아는 전략적 안목은 갖추지 못했다. 전후의 그는 국내 숙청에 골몰했다. 내부 다지기로 제 권력의 아성(牙城)만을 탐냈던 사람이었다. 부국이 강병으로 이어진다는 긴 흐름을 간과했다.”

 - 전후의 혼란기를 지난 뒤 1961년에 5·16이 있었다.

 “산업화에 성공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1950년대의 전쟁과 전후 복구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은 걷기 시작했고, 그런 힘든 과정을 토대로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에는 산업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이 걸었던 두 역정(歷程)이 서로 단절(斷絶) 상태에 있는 게 아니었다. 모진 고난을 이기고 일어설 줄 아는 우리 민족의 잠재력은 크다.”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는.

 “우선 국방의 초석을 허물지 말아야 한다. 군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일이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된다. 1950년대 말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말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고, 그 이후에도 정치적으로 잘나가는 엘리트 군인들에 의한 정치적 개입이 있었다. 아울러 안보의 축을 흔들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이렇게까지 성장한 대한민국의 군대가 자랑스럽지만, 그 자체로는 한반도 주변의 복잡한 상황에 모두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 끝으로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한말씀 덧붙인다면.

 “전쟁에 임해서는 무엇보다 실리(實利)가 중요하다. 아울러 긴 안목에서 싸움을 다룰 줄 아는 전략적 시각이 필요하다. 낙동강에서 분투해 대한민국을 지킨 정신도 중요하지만, 압록강에서 보인 뼈아픈 와해와 후퇴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절박한 위기에서도 모여들어 끝까지 싸우는 강인함에 침착함과 냉정함,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지략(智略)의 틀까지 갖춘다면 우리 민족은 분명히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유광종 자유기고가(전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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