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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弗 행방 여전히 '안개속'

중앙일보

입력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16일 “북한에 5억달러를 줬다”고 시인했으나 구체적인 자금 출처 및 환전·송금 경로 등은 일절 밝히지 않았다. 이 문제는 5억달러와 남북정상회담의 연관성을 밝힐 중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미 대북 송금한 것으로 확인된 2억달러의 경우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불법 대출해준 돈이고, 또 송금 때는 국정원이 ‘환전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머지 3억달러도 자금 마련 및 송금 과정에 정부가 개입했는지 여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현대는 특히 5억달러를 북한에 보낸 사실을 모든 회사 장부에서 누락시켰다. 분식회계·공시불이행 등 위법을 한 것이다. 이는 정부의 비호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자금 출처·송금 루트=5억달러 중 2억달러는 2000년 6월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특혜 대출해준 4천억원 중 일부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한나라당이 대북 비밀송금 의혹을 제기했을 때 현대상선 측은 “이 돈은 기업어음 상환, 선박용선료, 선박금융 용도로 썼다”고 해명했었다. 장부에도 북한에 보낸 것으로 기재돼 있지 않다. 장부까지 엉터리로 만든 것이다. 현대는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정부가 밝힐 의지만 있으면 금방 밝혀낼 수 있는 거짓말을 한 데에는 정부가 이 건을 덮어둘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

더구나 나머지 3억달러는 자금 출처에서부터 송금 과정 등 모든 게 안 밝혀진 상태다. 현대건설·전자 등을 통해 보냈을 것이란 의혹에 대해 정부·현대 모두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석연찮은 대출 과정=2억달러의 성격도 불분명하다. 지난해 가을 국회에서 엄낙용 전 산은 총재는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이 ‘그 돈은 우리가 갚을 돈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어떤 목적으로 쓰였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金전사장은 실제로 산은에서 대출받을 때 약정서에 자신의 서명도 안했다. 약정서 자체가 회사 명판도 다르고, 주소도 없는 등 비정상적으로 작성됐다. 사장을 제치고 다른 사람이 대출받았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특히 현대상선은 산은 대출을 받기도 전에 국정원에 환전 편의 요청부터 했다. 현대는 어떻게 대출을 확신했을까?

◇외압은 없었나=嚴전산은총재는 “지난해 여름 청와대 회의에서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 문제를 꺼내면서 현대가 ‘못 갚겠다’고 했다고 하자 청와대·국정원 관계자들이 ‘걱정말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그 이후엔 현대가 못 갚겠다고 하지 않았다고 嚴전총재는 덧붙였다. 사실이라면 현대는 왜 이렇게 태도를 바꿨나.

실제로 2000년 6월 말 현재 은행연합회의 여신현황 자료에는 4천억원 대출 사실이 누락돼 있다. 은행이 기업에 빌려준 돈은 단돈 1원도 다 기록하게 돼있는 장부다. 또 현대상선의 2000년 상반기 보고서엔 산은 대출금이 1천억원만 기록돼 있다. 산은의 문서접수 대장에는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 서류들이 모두 나중에 끼워넣기식으로 기재돼 있다. 이 모든 것은 현대가 처음엔 대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어떤 사유로 인정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청와대 등 정부의 압력은 정말 없었나.
이상렬 기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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