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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왜 이러나] 4. 눈앞의 이익 급급 사라진 도전 열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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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2002년 9월. 전자상거래 솔루션 개발업체인 K사 金모(42)사장은 직원 5명의 사표를 한꺼번에 받았다. 이들은 모두 개발 핵심 인력들로 4년 전 창업 때부터 일한 직원이었다. 이들은 "더 많은 연봉을 주겠다는 회사로 옮기겠다"고 했다.

내년부터는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며 金사장이 애원하다시피하며 붙들었지만 이들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金사장은 "창조적 열정과 모험심을 갖고, 어렵지만 한번 해보자는 의지를 불태우던 시절은 지났다"면서 "요즘 벤처 직원들은 눈앞의 수익과 연봉에만 관심을 둔다"고 말했다.

#2002년 12월. 화상회의 장비개발업체인 H사 李모(36)사장은 출근길에 '납치'됐다. 그를 강제로 끌고간 사람들은 이 회사에 2천만~5천만원을 투자한 사람들. 이들은 李사장에게 "2002년 말까지 코스닥에 등록시킨다고 해 놓고 왜 못했느냐"며 투자금에 이자를 붙여 돌려달라고 했다.

그는 경기 침체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 회사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 李사장은 '내년에는 요건이 충족되니 꼭 등록시키겠다'는 일종의 약정서를 써주고서야 풀려났다.

'벤처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벤처기업은 밤을 새워 일하며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투자자는 이런 노력을 믿고 흔쾌히 자금을 지원하던 '벤처 생태계'가 와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위기는 건전한 벤처정신과 투자문화의 실종 때문이라는 지적도 많다.

◇벤처문화가 사라진다=벤처 문화는 지금까지 대기업 중심 기업체제가 지녀왔던 오너 중심의 전횡, 상의하달식 관료적인 기업문화, 경직된 사내 커뮤니케이션 체제 등을 바꾸는 긍정적인 기능을 해 왔다. 그러나 경기가 침체되면서 이런 순기능들은 점차 위축되고 있다.

코스닥 등록 기업인 I사 崔모(45)이사는 "주가가 떨어지고 장사가 잘 안되자 직원들은 이직할 생각만 하고 있다"면서 "창업 때 가졌던 동업자 의식이 이제는 '종업원 의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이직이 잦은 것은 물론 회사의 영업비밀을 지닌 채 경쟁업체로 옮기는 사례까지 늘고 있다.

우호적이었던 벤처기업과 투자자들의 관계도 험악하게 변하고 있다. 최근 2년 동안 테헤란 밸리에선 투자자와 벤처기업의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벤처투자의 고수익만 쫓은 '묻지마 투자'때문이지만 이 탓에 건전한 엔젤투자자까지 몸을 사리고 있다.

◇아직 기회는 있다="벤처신화, 그 화려한 잔치는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불씨는 아직 살아 있다. 창업할 때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기업가 정신으로 다시 한번 회사를 일으키자는 분위기가 일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솔루션업체인 이네트 박규헌 사장은 "대다수의 벤처기업가는 인터넷 기반의 신경제에 대한 조급한 환상과 경험 부족에서 비롯된 시행착오 등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벤처정신이며, 지금도 많은 벤처 인들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회사는 지난해 12월 60여명의 전 임직원이 팀별로 한국리더십센터에서 '성공하기 위한 습관 변화'에 관한 연수를 받았다.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지 않은 회사도 많다. 종합 엔터테인먼트회사인 플레너스 박병무 사장은 게임개발 사업부문인 '손노리' 직원 30여명에게 지난 2년여 동안 게임개발에만 전념토록 했다.

그는 "개발자들에게는 창의성이 중요하며, 이익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면 좋은 상품이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손노리는 올해 6~7개 정도의 대형 게임을 발표할 예정이다.

김동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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