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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이철호의 시시각각

북한의 말투가 나긋나긋해진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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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논설위원

북방한계선(NLL) 드라마의 불씨는 사소했다. 지난해 9월 14일 동아일보 인터뷰가 화근이었다. 이 신문 정치부장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4 선언은 지켜져야 하는가?” 돌아온 답변은 교과서 그대로였다. “기존의 경계선을 존중한다면 10·4 합의에 포함된 여러 가지를 논의해볼 수 있다.” 흠잡을 데 없었다. 박 후보는 “김정은 제1비서와도 만나겠다”고 했다. 이명박정부 때 악화된 남북관계의 해빙에 무게를 실었다. 인터뷰 제목도 “남북 경색국면 어떻게든 대화국면으로 바꿔야”였다.

 문제는 보름 뒤에 나온 북한 반응이다. 국방위원회 정책국의 29일 보도담화는 고약했다. “역사적인 10·4 선언은 철두철미 NLL의 불법 무법성을 전제로 한 북남 합의조치의 하나”라며 “괴뢰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근혜‘년’까지 주제넘게 입에 올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낯 뜨거운 비속어는 이어졌다. “박근혜‘년’의 떠벌임이나 다른 괴뢰 당국자들의 주장은 그 어느 것이나 예외없이 북남공동합의의 경위와 내용조차 모르는 무지의 표현”이라 퍼부었다.

 이 장면이 선명하게 각인된 이유는 또 있다. 북한 TV의 젊고 예쁜 여자 아나운서가 등장해 또박또박 원고를 읽어 내려간 것이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고운 입술에서 “년”이라는 상스러운 표현이 스타카토로 튀어나왔다. 북한이 남한의 남성 지도자에게 온갖 험담을 퍼붓는 건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여성을 내세워 여성 후보를 모욕할지는 누구도 몰랐다. 북한이 박 대통령을 대놓고 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박 후보는 침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은 딴판이다. “난생처음 그런 모욕을 당하고 어떻게 발끈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박 후보는 주변에 “도대체 어떤 말이 오갔기에 북쪽이 저렇게 펄쩍 뛰느냐”고 캐묻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딱 열흘 뒤에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NLL 폭로가 터져 나왔다. 친이계 출신이 NLL 저격수로 나선 데는 정파를 옮겨타려는 또 다른 의도가 깔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NLL 불길은 확 타올랐다.

 당선 이후 박 대통령은 북한의 막말에 대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말부터 조심해야 한다”거나 “존엄은 북쪽에만 있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한테도 있다”는 발언은 그 뿌리가 다르지 않다. 결국 북한은 국물도 못 건졌다. 단단히 혼이 난 북한은 요즘 말투부터 눈에 띄게 나긋나긋해졌다. “귀측이 답변을 회피하였습니다” “더 큰 화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섬뜩한 협박도 꼬박꼬박 존댓말로 한다. 귀가 간지러울 정도다. 대단한 변화다.

 민주당 친노계는 타고난 싸움닭이다. 운동권 출신이 태반이다. 홍익표 의원의 ‘귀태(鬼胎)’나, 이해찬 상임고문의 “박정희는 누구한테 죽었나”라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일단 거친 대립각을 세우는 게 본능이다. 하지만 친노계의 NLL 혈전은 새누리당보다, 내심 안철수 진영을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호남에서 안철수 신당의 지지율은 민주당의 두 배에 이른다. 게다가 비극적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자칫 호남을 잃으면 친노계는 침몰할 운명이다. 초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북한마저 한 발 앞서 변하고 있다. 여성 대통령의 등장으로 싸움의 언어가 달라졌음을 간파한 것이다. 친노계도 치고받는 게 능사가 아닐 듯싶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어느새 돌고 돌아 ‘NLL 회의록 증발’로 이어졌다. 우리 사회의 절반 이상이 ‘NLL 포기는 아니다’고 반응하는데도 친노계는 중간에 멈춰 서질 못했다. 오히려 대선 불복을 향해 마구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친노계의 질주 본능이 스스로를 ‘사초(史草) 폐기’의 궁지로 몰아넣은 느낌이다. 박 대통령은 약자의 입장에 몰렸을 때, 항상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국민의 동정심이 집중된다. 이를 의식했는지 북한도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친노계도 이를 참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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