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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실천자「간디」 탄생 백주년 그의 생회와 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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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도대륙이 이 세상에 내놓은 위인들이 많지만, 사랑·자비·평화의 종교를 편 석가모니의 다음으로는 아마도 「마하트마·간디」와 어깨를 겨를만한 인물이 없다. 중국의 손문선생이 중국민에게 남긴 영향에 비견할만한 영향을 인도국민에게 남겨놓고 또 세계 어느 대 사상가 못지 않게 전 인류에 심오한 가르침을 남겨놓은 「간디」가 인도서부 「포르반다르」지방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난지 오늘 (10월2일)로 꼭 일백년.

<체험 통해 진리 찾아>
지난날의 대중운동 지도자로서, 또 성인군자와 같은 존재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교육·사회문제에 관한「간디」의 사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연구되고 인용되고 있다. 인류사에 크게 기여한 종교지도자,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 정치가들과 「간디」를 견주어보면 그에겐 하나의 특이한 점이 있다. 「간디」는 영국식민주의지배에서 인도대륙을 독립시키기 위한 대중운동을 지도하면서 명상과 체험을 통해 인간에게 영원한 실효성을 지니게될 생활철학을 계발하려 했다는 점이다. 「U·S·모한·라오」씨 말대로, 그의 「어프로치」는 이상주의적인것 같이 보였지만 「간디」는 그의 이 이상주의를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서 극히 실제주의적이었고 또 열매를 맺었다. 그가 인도국민으로부터 『국부』로서 숭앙받을뿐 아니라 세계적인 위인으로 흠모 받는것도 바로 이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명상과 체험을 통해 진리를 찾아내고, 진리를 인간 세상에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간디」의 상징으로 따라다니는 『비폭력·불살생』운동을 시작한 것은 남「아프리카」에서였다. 「런던」에서 법학공부를 마치고 남아의 「터반」에 간 「간디」는 그곳에서 두가지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유색인의 권익 위해>
어느날 법원을 방문한 「간디」는 백인경비원으로부터 머리에 두른 인도고유의 「터반」을 벗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고 또 어느때 당당히 1등 차표를 끊어 승차 했는데도 백인차장에게 밀려나서 대합차로 여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간디」는 귀국 할것인가 아니면 이 엄청난 차별의 불의에 항거할 것인가 망설이다 남아서 비폭력수단으로 이 불의를 시정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던 것. 이래서 1년 예정으로 남아에 간 「간디」는 20여년동안 남아안의 유색인종들의 권익을 위해 싸워 인도대륙의 한 청년은 세계의 인물로 등장했다.
그가 스스로 고통을 감수해가면서 비폭력저항운동을 벌여나간데서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고 후세에 길이 남을 위인을 부각했다. 「간디」철학의 기본 「교리」를 든다면 물론 진리와 비폭력(불살생). 그가 얼마나 진리를 고귀하게 여겼던가는 그의 자서전을 『진리를 목표로 하는 나의 경험』이라고 이름 붙인것으로 능히 짐작이 간다.

<감옥출입을 죽먹듯>
「간디」는 그의 이 저서에서 『진리를 희생시켜 (인도의)자유를 얻느니 나는 차라리 인도의 멸망을 택하겠다』고 말한 것은 진리 앞엔 어떤 것도 앞설 수 없다는 그의 「교리」를 설파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또 진리와 진리를 실현시키는 수단으로서의 비폭력·불살생은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궁극의 진리를 실현시키기 위해선 비폭력 방법을 인정하고 취해야 한다』고 설파했던 것.
그에겐 따라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시켜준다』는 「독트린」이 타당할 수 없었다. 1915년 남아에서 인도로 귀국한 다음 감옥출입을 식은죽 먹듯 하면서도 그의 진리와 비폭력동일시 「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힌두」교 민족주의지도자』라고 말한다. 비록 그의 신앙은 「힌두」교에 속했지만 그의 종교관은 범종교적이고 그의 도덕적인 가르침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했다.
그는 「힌두」교도이자 인도국민의 한사람이면서 결코 종교와 국가민족·인종을 구별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힌두」교 성전 못지않게 불경 기독교성경, 회교의「코란」을 열독하고 한 종파의 독선적 절대성을 완강히 부인하고 또 인간의 단일성과 모든 국가민족의 단일성을 설파하는 국제주의자이기도 했다.

<종교와 민족 구별안해>
비폭력·불살생을 가르친 「간디」가 인도대륙의 분단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각 독립한 후 「힌두」교도들과 회교도들간의 종교적인 살인극이 전 대륙을 흽쓸고있었던 1948년1월30일 폭력의 희생으로 세상을 뜬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종폭동과 살생이 난무하는 미국에서 「간디」의 가르침을 받들어 비폭력수단으로 흑인의 민권을 신장하려던 「마틴·루터·킹」목사도 「간디」와 같은 운명을 당한것은 다같이 슬퍼할 일이라 할까.

<시골상인의 아들로>
상인출신의 아버지와 일자무식촌부의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간디」는 「힌두」교의 교리에 따라 불과 13세 되던 해에 같은 나이의 소녀와 결혼, 4자녀를 두었다.
의지와 용기의 인물로 우리들에게 기억되고있는 「간디」에게도 인간미는 철철 흘렀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어린이들과의 농담. 맨발에 광목조각을 몸에 두른 차림이 「간디」의 상표와 같이 특징이었지만 그의 커다란 귀는 무엇보다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그의 귀가 「월트·디즈니」의 한 만화 주인공과 비슷하다하여 그를 「미키·마우스」라 불렀고 그는 그렇게 불릴때마다 한번 성내지 않고 간간 대소하곤 했다.
남편으로서의 「간디」는 범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그의 자서전 『진리를 목표로 하는 나의 경험』속에서 『나는 아주 질투심이 강하여 아내는 나의 사전승낙 없이는 외출 못하게 했다』고 말하곤 먼 훗날에 와서는 그것을 후회했다고 술회했다.

<철저했던 부부생활>
즉 자기 자신은 부인의 승낙 없이 마음대로 외출하면서 자기가 아내를 억압할 권리가 있었던가하는데 후회했다는 것. 그는 또 『부부생활에 철저』하여 일자무식인 아내에게 글을 쓰고 읽기를 가르쳐주려고 항상 마음먹고 있으면서 시간을 밤에 내야 할텐데 밤에는 되풀이되는 『육체적 욕정』때문에 가르쳐 줄 시간이 없었다고 같은 책에서 말하고있다.
「간디」는 『나와같이 일찌기 결혼하는 상식을 벗어난 처사를 도덕적으로 찬성할 만한 근거는 조금치도 없다』고 「힌두」교리에 의한 조혼을 탓했으나 결혼생활은 행복했던 편. 결혼생활 60년만에 부인은 「간디」보다 4년 앞서 1944년에 별세했다.
학교시절-특히 국민학교 시절에 관해서는 선생님들의 별명과 산수공부가 어려웠다는 것을 빼놓고는 거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다면서 자기두뇌는 수준이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지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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