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파나의 일대기|숟한 가명의 사범교출신… 9 세부터 항불독립운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890년 초여름 (5월19일세이유력) 배안남 (월맹납부)「게연」생「킴지연」에서 하급관리이떤서 항불독립운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호지명은 숱한 가명아래 교패-요리사- 교립운동-공개 독재자로 그의 일생을 점헌했다.
염소수염에 자흠이 성성한 호지명의 이름은 이것마저 본명이 아니며, 출생시의 이름은 「구엔·아이·콕」 (완애국) 으로 봉했다.
그는 마을학교에서 유교와 불교의 교육을 받고 있었으나 항불운동이 치인한 고장인 탓으로 9세때는 벌써 항불「레지스 닥스」의 연탄원느릇을 하게 되었다. 이때문에 19l0년 반항척주식촌란 낙인이찍혀 퇴학당하고 곧이어「후에」 사범소사로 옮겼다.

<7개국 국어에 통해>
민족주의교욱으로 한때 유명했던「후에」수범학교는 호「고·딘·디엠」전월남대통령, 월맹수상 「팜·반·동」, 동국방상 「보· 구엔· 지압」등을 알게되었다.
이곳을나온 호는 감시「메콩·델터」의「판티에트」에서 교편생활을하다 1911년 22세때 어떤뜻을 품고 불이선 「라트슈·트레비유」호의 사환겸「쿠크」조수로 취직,「유럽」「아므리카」및 미국등지의 촌계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아문을 넓혔다. 어뚜의 재질을 지닌그가 지·불두·독십체코촌 중국태본등 7개국어를 구사할수있게 된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에 잠시들려「뉴요크」와 「보스턴」의 빈민가를 살피면서 미국하류사희의 단면을 훝어, 보기도했다.

<갖가지 하류직업에종사>
1914년 불상선이「런던」 에기항했을때 선원 생활을 청산하고「런던」의 「칼튼·호텔」 에서 마시 요매사 조수노릇을했고, ,이어 독일로 건너가 어느 「호텔」의 주방장 (쿠크)으로 춰직했다.
다시 「파리」 에들러 처음에는 정원사, 쿠콘, 세탁소 고용원등 여러직업을 거친다음 사진관을 개업하면서 이때부터「프랑스」 좌익분 자들과 접선, 삭만의 안남인들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사합상의자 뿐아니라 공산주의고들의 모임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1919년 호는 「베르사유」평화합담에「베트남」독립을 인정하도록 했었으나 실패했다. 이윽고 1922년 호는 처음으로 제4차「코민테른」에 참석하기위해,「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이때「레닌」 「트로츠키」등 많은 공산분자들을 만나볼수 있었다.

<코민테른 정반속관사자도>
1925년봄 제5차「코민테른」총회에 참가한후 돌아오는 길에「라이·투이」라는 가명으로 중국의 국공합작공작을 도왔으나 시개로 돌아가자 귀국,1926넌 안남서년련을 결성하면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30년에는「홍콩」에「인도차이나」공근당을 수립했는데 당시 그는 상순에서 「코민테른」박속잭인자를 역임했었다.
호는 공당본부를「인도차이나」로 옮긴다음 「하노이」 에 들렀을때「프랑스」 독찰에 붙잡힐뻔했다. 「홍콩」으로 다시돌아온 그는 영국경찰에붙잡혀 1년동안 옥살이를 한다음 「프랑스」관충에 인도될기미가보이자 탈옥했다.

<대일항전 해방군결성도>
1940년 그는 다시「인도차이나」로 돌아와 대일항전을위해「베트남」 독립동맹회를 결성했으며 그후「베트남」해방으로 개명했다. 호는 1945연8윌 「하노이」로 돌아가「월남인민공화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친왈파와 반공인사들을 대거숙소했다.
1946년3월6일 「프랑스」식민지로부터 정식독립을 인정받고 곧이어 전정당을 망라한「인민민족넋선」을 결성하고「프랑스」와 협상을 시작했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8년간의 대불전을 벌였고「프랑스」는 「디엔비엔푸」가 확대되자 1954년 과거 초년간의「인도차이나」지배를 포기했다. <양회기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