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 수표 위조, 31명 철저히 역할 분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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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년여 전 교도소에서 한 방을 썼던 나경술(51)·김영남(45)씨가 만났다. 김씨의 친구인 김규범(46)씨 등도 함께였다. 이들은 나씨의 계획에 따라 100억원 위조수표 사기극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곤 범행에 필요한 31명을 섭외했다. 가담자들은 총책인 나씨를 호위할 팀, 가짜 수표 입금 뒤 현금을 빼낼 인출팀 등으로 역할을 나눠 맡았다. 일부 꼬리가 밟히더라도 전체 조직이 드러나지 않게끔 가담자들은 가능한 한 서로를 알 수 없도록 했다. 점조직을 구성한 것이다. 범행에 성공해 100억원을 빼낸 이들은 총책 나씨가 평가한 ‘기여도’에 따라 1억~33억3000만원씩을 나눠 가졌다.

 지난달 중순 발생한 ‘100억 위조수표 사기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경찰이 총책 나씨와 나씨가 내세운 ‘바지 총책’ 최영길(60)씨를 붙잡아 파악한 내용이다. 경찰 수사를 피해 도망쳤던 나씨는 지난 12일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최씨는 13일 부산 친척 집에서 검거됐다. 지난달 26일 경찰이 이들을 수배한 지 약 보름 만이다. 경기지방경찰청은 15일 100억원짜리 수표를 위조해 현금으로 인출한 혐의(사기 등)로 총책 나씨와 최씨 등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범행 시나리오는 나씨의 머리에서 나왔다. 첫 단계는 100억원 수표를 위조하는 것. 은행에서 백지수표를 구해서는 100억원을 기입하고, 진짜 100억원짜리 수표의 일련번호를 새겨 넣어 감쪽같이 위조한다는 계획이었다. 나씨 등은 국민은행 한강로지점 김모(42·구속) 차장으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았다. 그 뒤 대부업자 박모(45)씨를 찾아갔다. 박씨에게 “회사를 인수하려는데 자금 증명 같은 것이 필요하니 100억원 자기앞수표 사본을 잠시만 빌려달라. 사례하겠다”고 했다. 박씨는 수표 일련번호 뒤 3자리를 가린 사본을 전달했다. 위조책은 진본 백지수표와 100억원 사본 수표 번호를 활용해 가짜 수표를 만들었다. 박씨가 숨긴 일련번호 3자리 숫자를 나씨 등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나씨 등은 이 위조수표를 입금했다가 전액 현금 인출했다. 위조수표는 예금 전 은행 감식에서도 들키지 않았다. 빼낸 100억원은 ‘기여도’에 따라 나눴다. 범행 자금을 댄 사채업자 김모(42)씨가 33억3000만원을, 나씨는 18억9000만원을 가져갔다. 백지수표를 건넨 국민은행 김 차장에겐 5억~6억원이 할당됐으나 아직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범이 잡혔으나 수표위조책과 당초 사건을 공모한 김규범씨는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 경찰은 또 100억원 수표 사본에서 가려졌던 3자리 숫자를 알아내는 과정에 추가 가담자가 있는지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검거 당시 나씨는 또 다른 1000억원대 금융사기를 저지르기 위해 가짜 통장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고 밝혔다. 재력가를 속여 800억~1000억원 은행 예금계좌를 트게 한 뒤 가짜 통장을 돌려주고, 진짜 통장에서는 자신들이 돈을 빼내려 했다는 것이다.

수원=윤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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