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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자, 남들 눈치 보지 말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31호 28면

무소의 뿔처럼 씩씩하게 가고 싶은 길을 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아보니 영 아니다. 대학 시절 끔찍이도 듣기 싫어했던 그 소시민적이라는 말, 그런데 어느새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40> 『토니오 크뢰거』와 토마스 만

때로는 어떤 풍경들이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래, 지금 그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고개를 들어 먼 하늘 바라보다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20세기 괴테’로 불리며 독일 소설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1901년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주목을 받았고, 24년에는 죽음과 삶의 문제를 다룬 대표작 『마의 산』을 발표했다. 29년 노벨 문학상 수상.

그렇게 해서 20년 전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를 처음 읽었다. 다시 펼쳐보니 밑줄 친 문장에다 동그라미 표시를 한 단어들, 여백에 적어둔 낙서가 빼곡하다. 그중에서도 이 장면, 주인공의 현재 모습을 그의 여자친구가 명쾌하게 규정짓는 대목에는 별표를 세 개나 해두었다. 당시 이 문장이 그야말로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던 모양이다.

“당신은 길을 잘못 든 세속인입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세속인인 셈이지요.” 여기서 세속인은 소명 의식을 갖고 고뇌하며 살아가는 예술가와는 달리 현실 속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생활인이다. 독일어로는 뷔르거(bürger)로 불어의 부르주아와 같은 뜻인데, 국내 번역본에서는 그냥 시민으로 옮기기도 한다.

어쨌든 『토니오 크뢰거』에 숨은 묘미는 바로 여기에 담긴 의미를 추적하는 데 있다. 그러면 길지 않은 중편소설로 토마스 만의 젊은 시절 자화상이라고도 하는 이 작품을 처음부터 따라가보자.

크뢰거 영사의 아들인 토니오는 소년 시절 동급생 한스 한젠을 좋아하고 파란 눈에 금발인 잉에보르크 홀름을 짝사랑하지만, 이들은 습작노트를 갖고 다니며 시나 쓰는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실망한 토니오는 둘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경멸의 감정도 품는다. 그는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고향을 떠난다. 그런데 서른이 넘어 소설가로서의 자기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가고 있다고 자신하던 그에게 여자친구이자 화가인 리자베타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당신 자신이 다름 아닌 세속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에요.” 토니오는 “제가요?”라고 반문하면서도 마음을 정리하고 여행을 떠난다. 13년 만에 고향을 찾은 그는 아련한 그리움에 젖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신분증도 없이 원고 교정지만 들고 있던 그는 수배자로 몰려 경찰에 체포당할 뻔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는 발트해를 건너 덴마크의 올스고르에 있는 해변가 호텔에 도착하는데, 축제가 벌어지던 날 그 옛날의 한스와 잉에를 만난다. 순수함과 명랑함, 찌들지 않은 삶을 상징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그는 가슴을 울리는 날카로운 향수(鄕愁)의 고통을 느낀다.

“내가 너희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결코 없다. 너 한스도, 그리고 너 금발의 잉에도! 내가 소설을 쓴 것은 너희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박수갈채를 받을 때마다 혹시 너희들이 근처에 있는가 하고 남몰래 살펴보았던 것이다.”

토니오는 잉에와 한스처럼 자기도 지식의 저주와 창조의 고뇌에서 해방돼 행복한 일상 속에서 사랑하고 살아가고 싶다. 다시 한번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는 게 이 세상에 없다.”

음악이 들려오고 두 사람은 춤을 춘다. 불현듯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잠을 자고 싶은데, 그대는 춤을 추자고 한다.’ 여기서 잠을 잔다는 것은 소박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춤을 춰야 한다. 그것도 난해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예술이라는 칼춤을 끝까지 춰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두 세계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길을 잃고 방황하며 고통받는 자기를 본 것이다. 그는 회한에 젖어 리자베타에게 편지를 쓴다.

“저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견디기가 좀 힘듭니다. 당신들 예술가는 저를 세속인이라 부르고, 세속인은 세속인대로 저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그는 비로소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미의 오솔길 위에서 모험을 일삼으며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하고 냉정한 예술가가 아니라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세속적인 애정”을 간직한 예술가다. 그가 본 한스와 잉에의 모습은 다름 아닌 그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세속인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이다.

“리자베타, 나는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저의 가장 깊고 은밀한 애정은 금발과 파란 눈, 아름답고 활발한 사람,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선량한 것이고 결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동경과 우울한 선망, 그리고 아주 약간의 경멸과 완전하고도 순결한 행복감이 들어 있습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남들 눈치보지 말고 살아가면 된다. 그것이 아무리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내 삶이야말로 나의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이니까.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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