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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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언어가 없는 오직 가슴 조이는 순간
45억년의 침묵이 소리를 발한다.
인간의 더운 숨결이
텅빈 달을 밟았다.
얼음 같은 밤과
용광로 같은 낮의 층계들이
과감한 순례자에 의해 친밀해 지면서
또 하나의 대초가 발견되었다.
황무지에 바람이 인다.
빛이 움직인다.
잠자던 두려움들이
인간의 미소를 받아 환호한다.
사람을 잉태한 달의 고통이
열과 구토를 발한다.
어디선가 파도가 몰려와
풀빛 바다를 내뿜고
둘레를 돌던 별들은
축제의 장미를 뿌린다.
황옥색의 광선이 이울어지며
금 은의 오린지 색으로
달은 그 긴긴 고요에서 깨어난다.
한 둥그러미의 빛깔만을 아쉬워 하던
인류의 갈망이 거기 목마른을 축인다
무한의 세월이 생과 죽음을 넘어
수십억년을 타오르고 있을 때
지구엔 오만과 영욕의
시끄러움만이 번식하였다.
지금 기절 할듯 숨가쁜 아가씨들과
어리둥절한 세계의 사나이들은
혼미에 빠졌다.
서로가 모독하므로 명예를획득하려던
지구의 선구자들은
참회의 바닷가에 조용히
머리를 숙인다.
달은 암시와 비유의 베일을
벗어 버리고
종족도 국경도 없이 우정으로 엉킨
서로 비슷이 손을 내민 사람들게
가까이 가까이 아주 가까이와서
이념의 변화를 일으킨다.
인간의 숙소는 달의 어느 꼴짜기리라
또 다른 별의 창문을 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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