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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연극|타성속에 의사「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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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연극붐」이라는 말로써 이 상반기 결산서의 서두를 꺼낸다면 약간 어폐가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볼때 몇가지의사 「붐」현상이 일어났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첫째는 공연성적이 좋아서 적자를 내지않고도 연극을 할수 있을는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걸게 해줬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매스컴」의 협조나 동원이 잘되어서 성적이 좋았다는 그 공연들의 실지 내용보다도 더 크게 외부선전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세째로는 그 성적이나 선전보다 더 부풀어 오른 연극인(특히 극단 관계자)들의 자기만족이 이런 의사 「붐」현상을 일으킨 것같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공연성적이 좋았댔자 기껏 인건비없는 기본제작비용을 건져냈다는 정도이상의 것이 아니었고 「매스콤」의 협조란 당선희곡이나 수상기념공연아니면 연극상 참가등등의 자체사업과의 관련에서 눈에 띄는 것이 대부분이고 거기다 주간지「붐」이 곁들여 종래보다 지면의 할애를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관객구성도 비정상>
그리고 관객동원이라지만 여대생이 전체의 7∼8할이나 차지하는 관객구성이 과연 정상적이냐도 재고해봄직하다.(하긴 그정도의 취미와 감상수준을 가진 관객층을 얻은 것만도 우리나라에서는 과분한 일일는지 모른다.)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붐」이야 어찌됐든 연극인 자신들의 자기만족이나 안이한 기대가 천만부당하다는 뜻에 있다.
국립극장을 중심으로한 공연 숫자를 대강 생각나는대로만 꼽아 보아도 14개(실험3, 국립극단2, 광장·가교, 산하·민중·제작·배우·자유·신협·여인 각1)나 되는데 그중 기억할만한 무대가 과연 몇이며 특기해야할 연기가 몇이나 있었던가 말이다. 대극장 공연이라는 형식에 이끌려 형식적인 연습에다 타성을 벗지못한 무대로 거의 유일화한 연극현상이 몇달동안 연속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소감이다. 어쩌면 연극이 잘될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필자 역시 금년 봄 「시즌」에는 걸어보면서도 우리가 진정 변화와 발전을 위한 아무런 계기도 잡아보지 못한 아쉬움은 금할 길이 없는 것이다.
금년에도 창작극이 우세했다. 아니 우세했다기 보다도 숫적으로 열세한 번역극이 그나마 「레퍼터리」선정에있어 무원칙이 었기때문에 차라리 우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옳겠다. 『피가로의 결혼』(실험) 『마리우스』(자유)·「연인안나』(민중) 「고독한 영웅』 (산하) 『부활』(배우) 「올폐』-.

<야심작계획 없어>
이렇게 순서없이 나열해 보았을때 우리는 왜 번역극을 하느냐에 대해 다시한번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극단마다 선정의 이유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번역극 공연의 기획이 우리연극에다 무게와 자극을 전달해주는 촉진제적 역할까지도 감안해야 할 것이라면 금년에는 통틀어 안이하다고 밖에 할수없다.
창작극의 경우는 우리자신의 여건이 결정적 지배력을 찾지만 번역극의 선택에 있어서는 좀더 야심적이고 창의를 살릴수 있는 여지가 있지가 있지 않은가. 극단 「리더」들의 재성을 바란다.

<참신한 신인작품들>
창작극 분야에서는 금년에도 3편의 신인작품이 등장했다. (『죽은나무 꽃피우기』 『환상살인』 『마술사의 제자』)
작품의 짜임새에 미숙한 점이 있으나 기성의 모방이 아니란 점에서 모두 살만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무대화과정에서 그 미숙함을 「커버」해주기는커녕 오히려 확대시켜놓은 느낌을 주는 것은 젊은 작가들을 위해 불행한 일이었다. 이 타성의 풍토를 개선할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나 비판과 비관만이 능사는 아니리라. 금년 상반기의 즐거운 「뉴스」를 필자 나름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첫째는 「카페·테아트르」-이 지나치게 「살룽」적인 다방극장은 그러나 극장연극을 탈피하고 지양하는 움직임으로써 하나의 귀중한 시도이다. 타성의 풍토가 개선되기위해서는 우선 대극장위주의 공연을 피해보는 일과 장막극이외의 시도를 해보는 일이 병행해야한다. 그길을 통해서 연출이나 연기는 속임수나 얼버무림없이 관객과 대결하는 기회를 가질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와 유사한 연극장소가 많이 생겨날 것을 기대하는 의미에서 「카페·테아트르」의 탄생은 1969년의 기억할만한 사건이 될 것이다.
둘째는 오태석의 작품『유다여, 닭이 울때까지』-작년에 출만한 이 준신인은 확실히 자기것을, 그것도 매우 연극적인 발상아래 표현할줄 아는 청신한 기법까지 아울러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세째는 「드라머·센터」에서의 유덕형연출작품발표회-미국서 돌아온지 얼마안되는 이젊은 연출자는 그의 연출 「스타일」 에 동의하건 말건 사람들에게 「연출」이 얼마나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인가를 여실히 가르쳐주었다. 우리 연극의 의사「붐」뒤에 도사린 끈질긴 타성을 깨기위해서는 그의 「쇼크」요법 또한 매우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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