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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왜 이러나] 2. 온실정책이 자생력 죽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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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벤처거품이 꺼져가던 2001년 9월. 재정경제부와 민주당은 벤처경기 활성화를 위해 기발한 제도를 들고 나왔다. 투자자가 벤처기업에 투자한 뒤 손실이 나면 원금의 일부를 보상해주는 '벤처투자 손실보전제'다.

손실액의 80%까지 보전해주기로 한 당초 안은 '투자에 대한 위험은 투자자가 책임져야 하는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는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고 보전율을 50%로 낮췄다. 하지만 결국 11월 이 제도는 없던 일로 됐다.

이 해프닝은 관(官)주도 때문에 허약체질로 변한 벤처기업을 다시 한번 비(非)시장적 발상으로 치유하려던 대표적인 사례다. 현재 벤처기업들이 벼랑끝까지 몰린 것은 벤처육성을 시장기능보다는 관 주도로 끌어온 현 정부의 빗나간 벤처정책 때문이라는 지적이 높다.

◇정부가 양산한 허약 벤처들=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 외환위기 수습책의 하나로 벤처육성을 들고 나왔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재벌중심 경제발전 모델의 대안으로 벤처기업을 키우겠다는 카드를 선택한 것. 하지만 이 선택의 결과 '시장'은 사라져버리고 '보호'만 남았다.

예를 들어 1997년부터 시행된 벤처확인제도는 정부가 인정한 벤처기업을 선택적.차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일단 벤처확인증을 받으면 법인세.소득세 50% 감면, 취득세.등록세 면제는 물론 병역특례인정.수출시장개척 지원 등의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심지어 코스닥 등록심사 때 자본금.경상이익.부채비율 등의 등록요건을 면제해줘 코스닥에 쉽게 등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제도는 많은 기업들에 '벤처인증'을 받으면 코스닥에 등록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켰고, 일부 벤처기업들로 하여금 기술개발보다는 코스닥행에만 힘을 쏟는 머니게임에 매달리게 했다.

실제 1999년부터 코스닥등록기업이 늘어나면서 머니게임이 횡행, 1998년 7조8천억원에 불과했던 코스닥시장 시가총액은 1999년 98조7천억원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이후 거품이 꺼지면서 지난해는 37조원대로 떨어졌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이인찬 박사는 "진짜 벤처와 부실 벤처를 골라내는 시장기능이 사라지면서 '모험정신'이 가득 찬 기업가보다는 투기꾼들이 등장했고 벤처거품이 심화됐다"고 말했다. 정현준, 이용호, 진승현 게이트 등 각종 벤처비리가 터져나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얘기다.

◇퇴출조차 어려웠다=다음커뮤니케이션 이재웅사장은 "경쟁력 없는 벤처는 일찌감치 퇴출됐어야 하는데 정부가 계속 살려주면서 문제가 더욱 꼬였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벤처거품이 꺼지던 2001년 5월부터 벤처기업 채권담보부증권(P-CBO)제를 도입, 숨이 끊어지던 벤처기업을 살려냈다. 벤처기업이 발행한 채권담보부증권을 기술신용보증이 1백% 보증해 투자자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총 9백73개사에 1조9천2백억원이 지원됐다. 하지만 결과는 벤처기업 구조조정의 지연이었다. 퇴출돼야 할 부실벤처가 허위 매출 등으로 투자를 받아 목숨을 연명하고, 건강한 벤처가 오히려 적절한 자금지원을 받지 못해 동반 부실화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됐다.

당시 한 온라인교육업체의 기획실장이었던 李모씨는 "다른 업체와 가짜 세금계산서 등을 주고받아 매출을 늘려 지원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정부는 뒤늦게 지난해 2월 부실벤처기업을 즉시 퇴출하는 등 벤처기업 건전화 방안을 수립하고 대책마련에 나섰지만 망가질대로 망가진 벤처를 살리는데는 역부족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김종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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