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 … 김대중, 36년 만에 무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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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엄혹한 유신 시절의 끝이 보이지 않던 1976년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선 3·1절 기념 미사가 열렸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대중(2009년 작고) 전 대통령, 윤보선(1990년 작고) 전 대통령, 문익환(94년 작고) 목사, 함석헌(89년 작고) 선생, 정일형(82년 작고) 전 의원과 함세웅(71)·문정현(73) 신부, 이해동(79) 목사 등 700여 명이 성당을 가득 메웠다.

 이우정(2002년 작고) 전 민주당 고문(당시 서울여대 교수)이 묵묵히 낭독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 나라는 1인 독재 아래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박탈하고 있다.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 투옥된 민주인사와 학생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민주주의 만세!”

 훗날 ‘민주구국선언문’으로 불리는 글이다. 검찰은 20여 일 뒤 “일부 재야인사가 반정부분자들을 규합해 긴급조치철폐·정권퇴진 등을 요구하는 불법적인 구호를 내세워 정부 전복을 선동했다”며 가담자 18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그해 12월 서울고법은 김 전 대통령 등에게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정 전 의원 등에게 징역 4년과 자격정지 3년을 각각 선고했다. 대법원은 이듬해 3월 판결을 확정했고, 피고인들은 옥살이를 했다.

 지금은 ‘민주화 투사’로 꼽히는 ‘민주구국선언사건’ 관련자들이 36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8부(부장 이규진)는 3일 김 전 대통령 등 유족 또는 본인이 재심을 청구한 15명에 대해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는 여기 있는 피고인과 가족에게 말씀드리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며 “피고인들의 인권을 위한 헌신과 고통이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기틀이 됐다”고 밝혔다.

 이날 재심은 지난 3~4월 헌법재판소·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잇따라 위헌·무효라고 판단한 데 따라 열렸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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