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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출세라면 무엇이든지 문공위서도 바쁘고 과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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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화당소속김규남의원이 간첩 사건과 관련되어 구속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그럴수가…』하고 놀랐다. 그러나 평소에 그를 알고있거나 그의 얘기를 들은일이있는 사람들은『그럴 가능성이 있었을것』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고향인 전남 보성 일대에서는 재일교포였던 그가 조련계였을 것이라는 소문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경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있던 60년, 7·29선거에 무소속으로 보성에서 출마한 일이있다.
그때 같은 재일교포로서 거류민단단장을 지낸 김금석씨도 이지구에서 무소속으로 임후보하여 싸음을 벌었는데 그는『김규남이는 조련계』라고 공격을 가해 어느사람은 믿고, 어느사람은 선거전에 gms히 있는 과장 모함이라고 생각했다.

<동경있을때 고학>
김규남을 잘아는 모씨는 그가 동경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닐때 조총련계의 손길이 뻗쳤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추측했고 또 그의 중학동창들의 말로는 중학시절에도 과격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순천중학을 졸업한 48년8월, 졸업식 다음날 경남통영에서 일본행 밀항선을 닸다고해서 동창들사이에 화제를 일으킨 일이있다. 보성군도성면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몹시 어려웠다.
그는 순천중학 시절에도 고학을했고 동경에서도 어느때는 곡괭이질을하는 노동판에까지 나가고생을 했다고한다.
국회의원이된후 그의학력난은 동경제국대학대학원, 영국「케임브리지」대학,「덴마크」국제대학등으로 매우 화려하지만 그실은 일본에서 입명관대법과, 명치대학대학원을 졸업했고 동경대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케임브리지」에는「세미나」에 참석한 것이다.

<「7·29」때 정계에>
동경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동안 모지방지의 동경특파원직을 맡았었는데 그런 인연으로해서 그신문의 K사장으로부터 적잖은 후원을 받았다는얘기다.
그가 처음 정계에 발을 디딘것은 7·29선거에 출마한때인데 당시 동대대학원에 다니고 었던그가 선거자금을 어디서 조달해 냈는지 궁금한일인데, 그당시부터 인지는 알수없지만 부산에있는 재일교포 모실업가와는 의형제를 맺고있는 사이로서 그로부터 상당한 재정적 뒷받침을 받아왔다고한다.

<재영시 연락 끊고>
7·29선거에 낙선한후에는 서울문리대에 시간강사로 나갔고 외대에서는 정치학 담당전임강사를 지냈다.
5·16혁명후 다시 정치에 손을대기시작한 그는 공화당창당초에입당해서 선거때는 유세원으로 활동을 많이했다.
63년 6대국회의원선거에 보성지구에공천신청을내어 이백내 김금석씨등과 치열한 경합을벌였는데 선거대책위에서는 공천자로 결정되었지만 당무회의와 청와대에서 뒤집혔다.
공천에서 실패한후 외대에 나가고있던 그는 65년에 영국「케임브리지」대학의「세미나」에 참석하게되어 1년간 거기서 머물렀다. 그가 영국에 체류하고있는동안 상당히 오랜기간 선거구와의 편지연락이 끊어진일이 있었다고한다. 지역구출마를 원하고있는사람이 외국에 가서 선거구에 편지를내는 일을 게을리할리가 없는데 체영기간중에 편지연락을 단절한 공백기간이 왜 생겼는지 알수가 없었다고 그를 잘아는 모씨는 의아해했다.

<공청 두번 떨어져>
중앙정보부의 조사결과 이때 초청자였던 박대인에게 포섭되어 동「베를린」북괴「아지트」를 거쳐 66년1월 평양에 가서 북괴노동당 연락부장 이효순등과 회합, 노동당에 입당한것으로 밝혀졌다.
67년7대국회의원선거에 다시 공화당공천신청을낸 그는 경합자를 누르고 선거대책위와 당무회의에서 공천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최종단계인 청와대에 가서 번복, 채달승씨로 바뀌는 바람에 두번째 고배를 마셨다. 이때에 그를 적극지지한것은 C당무위원이었고 영향력있던 K씨도 그를 좋아했다는 얘기다.
지역구 출마를 하지못한 그가 전국구후보 20번으로 공천된것은 그가 대통령선거동안에 보인 열성적인 활동의 공로가 인정되었고 Y씨의 추천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기관서 배경의심>
그당시 공천과정에서도 김금석씨등이『김규남은조련계와 가깝다』고 반대공작을 벋였고 치안관계기관에서도 김씨의 사상적배경이 과히 미덥지 못한 요소가 있다는점을 들어 공천을 주지말라는 의견을 제출한 일이 있다고한다.
국회의원이된 그는 그가 속해있는 문공위동료의원들사이에서『매우 바쁘고 과묵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문공위회의에도 별로자주 나오지 않을뿐더러 소속의원들이 어울려갖는 주석이나「파티」에도 드문드문 참석할뿐이었다.

<어려운 말 잘쓰고>
회의에 참석하더라도 별로 말을 않는편인데 한번 발언이나 질의를 하게되면 매우 어려운응어를 써가며 거창한 얘기를 하기좋아하는편. 작년 국경감사에서 전남도교위에서 어찌나 어려운 말로 질문을 했던지 발언이 끝난후 답변에 나선 교육감이『너무 어려워서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으니 욧점만 쉽게 다시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한적이 있을정도.
국회의원 2년여에 전남일대에는 착실한 기반을 닦았고 지방공무원의 이동이나 이권청탁에도 밝았다고 한다.

<휴회중엔 일본에>
그를 잘 아는 사람의 얘기로는『그는 철저한 출세주의자이기 때문에 출세를 하고 돈을 버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않고 해낸다』는 것이다.
그는 국회가 휴회중인때는 주로 일본에 가있는 편이고 그렇지않은때도 자주 일본을 왕래했다.
서울 동대문구 보문동에 있는 집에는 부인과 쌍동이 딸이 있지만 1년중 집에있는 기간과 일본에 가있는 기간이 어느쪽이 더 긴지 알수없을 정도.
지금 부인과는 6대 국회 선거전에 두번째로 결혼했는데 첫번 결혼은 부인쪽의 사정때문에 얼마 안가서 갈라졌다는 것이다.

<윤용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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