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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영광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집권에서 하야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른바「드골」새대는 1959년l월 그가 제5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가 59년 거의 절대적인 대권을 가진 대통령으로「프랑스」국민앞에 군림하게된 계기는 58년「알제리」반란분자들이「드골」의 정권복귀를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요망에「드골」자신도 출마를 성명하고 그해 6월 수상으로 취임했다. 58년의 수상이란 위치는 이른바「드골」시대를 이루게 할 수 있을만한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대권받은 대통령>
그는 의회로부터 위임된 권한으로 새 헌법을 기초하고 이 헌법에 대통령의 권한을 유례없이 발대한 것으로 규정한뒤, 59년1월 자신이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서방세계의 세력분포에서 미국에 도전하는 새시대를 이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역사 하나의 시대를 획한 그의 등장은 일차적으로 그의 집권이 이를 가능하게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의 집권전의「프랑스」정정의 혼란과 이로인해 그에게 대권을 위임한 헌법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왜냐하면 그는 58년 전에도 이미 수상으로 집권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44년엔 임정수상>
1940년 국방차관에 취임했다가 제2차 대전에서「프랑스」가 독일에 제압되자 철저한 항전을 부르짖은「드골」은「런던」으로 망명했다. 43년「알제리」에 국민해방위원회를 조직하고, 44년9월「파리」해방후 임시정부 수상으로 취임했다. 46년 1월 자유선거에서 사회당 내각이 성립되어 그는 하야, 47년「프랑스」국민연합을 조직, 총재로 취임했다가 53년 이를 해체한 경력이 있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60년초 최초의 원폭실험이 성공했다. 그후 대외적으로는 비록 1백만명의「알제리」거주「프랑스」인들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르기는 했어도 그는 62년「알제리」분쟁을 명예롭게 종결시키는데 성공했다.
대외적으로는 12년간에 걸친 정정 불안 끝에「드골」특유의「강자통치」라는 정치형태를 통해「프랑스」국내에 안정을 회복했다.

<2등국서 1등국>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프랑스」를 2등국의 위치로부터 1등국의 위치로 회복시키는 과업의 첫단계로 서구 대연합구상을 표명했다. 이어 63년 1월 영국의 구주공동시장가입에 반대함으로써 영국을 견제하고 그해8월 동남아중립화구상을 표명함으로써 미국의 동남아정책에 반대, 동남아에서의 미국의 힘을 견제했다.
64년1월 중공을 승인함으로써 동맹국 미국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하고 66년7월「나토」통합군사기구 이탈 등 일련의 독자적인 정책을 속속 표방하여 국제사회세력권의 다극화를 촉진했다.

<반표는 싫증에서>
그 사이 65년12월엔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드골」집권10년을 맞이한 68년5월에는「파리」에서 월남평화회담이 열려「드골」정권의 안정과 위신은 확고 부동한 듯이 보였으나 동시에 발생한「5월 위기」는 총파업, 반정부「데모」등으로 예상외의 파란을 초래했다.
그러나 6월의 총선거에서 공전의 대승리를 얻어 제2기「드골」시대가 시작되는 듯 했다.
8월에는 제1회 수소폭탄 실험도 시행되었으나 5월 위기가 경제에 미친 영향은 커서 11월엔 심각한「프랑스」위기가 찾아 왔다. 이 때문에「드골」의 위신은 다시금 흔들려 69년4월27일에는 그의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국민은 그를 불신임했다. 이번 국민투표에서의 그의 패배는 그의 그동안의 시책에 대해 국민들이 반대했다기 보다는 11년에 걸친「드골」시대에 싫증을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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