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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프트파워, 진시황릉 병마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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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발굴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1974년 봄 긴 가뭄이 산시(陝西)성을 강타했다. 도처에서 우물 파기 열풍이 불었다. 린퉁(臨潼)현 시양(西楊)촌도 예외가 아니었다. 청년 6명이 동원됐다. 4m 정도 파내려 갔을 때 양즈파(楊志發)의 곡괭이에 불꽃이 튀었다.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머리가 나왔다. 긴 뿔이 달린 머리, 둥그런 두 눈, 팔자 수염 아래 입술을 꽉 다문 모습이었다. 곡괭이와 삽이 아래를 파내자 도제(陶製) 머리와 팔, 다리 등 조각들이 나왔다. 벽돌 위에 서 있는 무장한 무인상이 나왔다. 대형 기계 활과 청동 화살도 나왔다. 그해 3월 29일, 2000여 년간 잠자던 지하 진(秦)나라 군단이 나왔다. 하지만 농부들은 진나라 유물 여부를 판별할 수 없었다. 진흙 머리를 집에 가져가 가신(家神)으로 모셔 놓은 채 마저 우물을 팠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진시황릉(사진 위).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76m인 무덤 내부에 수많은 병사와 말 모형이 있다. [중앙포토]

 5월 말 베이징서 근무 중이던 신화사 기자 린안원(藺安穩)이 고향인 린퉁현을 찾았다. 부인과 아이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부인으로부터 농민들이 발굴한 도용(陶俑·진흙 인형)이 문화관에 보관돼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2000년 전 진나라 병사다. 국가의 진귀한 보물이다”라고 단언했다.

 어떻게 알릴 것인가가 문제였다. 즉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인민일보’ 평론부에서 일하던 대학동창 왕융안(王永安)을 찾아 의논했다. 그는 먼저 인민일보 내부참고(일종의 정보보고)를 통해 중앙 지도자들의 주목을 받자 고 말했다. 당시는 유교를 비판하고 법가(法家)를 재평가하는 ‘비유평법(批儒評法)’ 운동이 한창이었다. 진시황의 무사용(武士俑)은 진시황의 법가 노선의 중요한 실물자료였다. 선전 부분을 총괄하던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보고를 듣고 칭찬하며 보도를 허락했다.

 74년 당시는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장칭(江靑) 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인민일보 보고를 들은 장칭이 꼬투리를 잡고 화를 냈다. “린퉁현 영도 동지들이 비밀 보호에 집착해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덕택에 일은 빨리 진행됐다. 놀란 야오원위안이 국무원의 담당 부총리인 리센녠(李先念)을 찾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챈 리센녠은 린안원의 정보보고를 즉시 우칭퉁 국무원 부비서장과 왕예추(王冶秋) 국가문물국장(한국의 문화재청장 격)에게 전했다.

 왕예추 국장은 평생 최고의 희열을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최정예 문화재 전문 발굴단이 꾸려졌다. 즉시 시굴조사가 시작됐다. 76년 추가로 두 개의 용갱(俑坑)이 발굴됐다. 병마용 발굴팀을 가장 흥분하게 만든 것은 한 자루의 청동검이었다. 길이 91.3㎝, 너비 3.2 ㎝의 날카로운 날을 가진 은백색의 청동검은 ‘형가가 진 왕을 찌르다(荊軻刺秦王)’라는 『사기(史記)』 기록의 비밀을 푸는 열쇠다. 형가의 습격을 피하던 시황제는 칼날이 너무 길어 칼을 뽑지 못했다. 시황제는 겨우 청동검을 뽑아 형가의 다리를 한 번에 잘라 암살을 모면했다. 출토된 청동검의 크기와 예리함은 왜 진시황이 한 번에 검을 뽑지 못했는지, 어떻게 사람의 다리가 한 번에 잘릴 수 있었는지 웅변한다.

 현재 일반에 공개된 병마용 1·2·3호 갱의 총 면적은 2만2780㎡다. 7호 갱까지 발굴 중이다. 도용의 크기는 사람과 같다. 가장 큰 것은 1.96m, 가장 작은 것은 1.78m. 평균 1.8m다. 8000여 개 발굴이 끝났고, 지금도 발굴 작업은 진행 중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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