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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강직희 화신|고 일석 변영태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일석 변영소옹은 조용히 그리고 쑬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난해12월5일 고령에도 불구하고 북아현동 자택에서 손수 연탄불을 갈아넣다가 위험량의 「개스」를 마셨다.「세브란스」병원에입원했으나 뇌혈전증까지 병발하여 지난 2월8일 퇴원한 후 자택에서 치료를 받아오던 중 회복하지못하고 77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그는 뗘났지만 그가 지녔던 고고와 청빈은 우리의 기억속에 영원히 살 것이다.
그가 운명한 북아현동 단간방에는 외국잡지몇권이 놓여있는 「테이블」과 전축한대뿐.
64년이래로 그는 영어학원강사로 나가면서 몇푼 안되는 강사료로 생계를 이었으며, 면도를 손수 갈아 쓰기도했다.
이런 생활가운데서도 그는 남이 뭐라고 하든 세상에 아무런 불편이나 불만을 말하지 않고 청빈한 선비로 살아왔다.
일석은 평소 고전음악을 무척 즐겨했었는데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밤늦게 강의가 끝난 후 그가 좋아하는 고전음악 「레코드」를 사들고 북아현동「버스」를 타고가는 모습은 일석의생활단면이였다.
그는 고전음악 가운데서도 「바흐」 「브람스」를 특히 좋아했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자세는 63년 제5대대통령선거에서 단적으로 나타났고,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에서 손을 뗐다.
그는 출마의 변으로 『돈을 안쓰는 정치』를 주장했고 다른 정치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반만큼 이라도 돈을 안스기를 바랐었다.
입후보한 이상 그는 표면상으로는 대통령에 당선될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깊은 마음도 반드시 그랬는지는 알수없었고, 『돈안쓰는 정치』를실천으로 보여주기위한 것이었는지도모른다.
○…53년「유엔」총회때는 물론54년「제네바」정치협상에 참석하고돌아올때도「아령」과 옷가지만을 갖고다녀 화제가 됐었는데 이보다 앞서 49년「필리핀」독립식전에 대통령 특사로 가서 대한민국 승인을 힉득할때도 『한시도 아령을 쉴 수없다』하여 수행했던 여용식대사는 아령을 사러 적도직하의 「마닐라」 시가를 헤매기도했다.
○…총리재임중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의 청탁을 거절하여 미움을 살 정도로 청렴했던 그는 외국에 다녀올때는 항상 출장비를 남겨서 국고에반납했을정도로고지식했다. 51년부터 제3대 외무장관으로 있을때 그는 월요일마다 전직원을 모아놓고 절약을 강조하면서 자전거를 타도록 권장했다.
그의 강직은 어디서나 변함없었다. 53년 「유엔」총회때는 당시 인도대표였던 「크리슈나·메논」에게 인도의 용공적태도를 신랄히 공박하다 총회의장에게 주의를 받을정도였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평화선 선언」을 선포했고 (52년1월) 「제네바」정치협상때는 처음으로 남북한 총선을 골자로 하는 14개항을 공식 제의하여 우리통한방안의 기틀을 마련했을뿐만아니라(54년5월) 한미안보의기반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53년10월). 62년 고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일석의 저서로는 외교여록, 논어영역과 「나의조국」등 4권의 영문판이있다. <허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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