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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날 부산 바다 침투한 적 600명 우리가 무찔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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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독일 잠수함 부대의 모자를 쓴 노병 최영섭. “천안함이 북한의 잠수함에 당했다. 잠수함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노병 최영섭(85)에게 6·25전쟁의 기억은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월급에서 5~10%를 갹출해서 대한민국 첫 군함 ‘백두산함’를 장만했던 일, 미 해군이 쓰다 넘겨 준 ‘백두산함’ 표면의 녹을 벗겨내고 흥에 겨워 페인트칠을 한 일, 1950년 6월 25일 저녁 부산 앞바다에서 검은 연기를 발견하고 추적했던 일까지. 최근 출간한 『6·25 바다의 전우들』에는 포술사로 참전했던 당시 ‘최영섭 소위’가 겪은 일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선체를 까맣게 칠하고 국기도 달지 않은 선박이었지. 가까이 가서 보니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가득하더군. 우리 배 함장은 장교 전원을 사관실에 집합시키곤 ‘전투에 돌입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꼭 이기고 다시 만나자’며 컵에 냉수를 따랐어. 다 함께 건배하며 ‘싸우자’ ‘싸우자’ 외쳤어.”

 전투는 치열했다. 갖고 있는 포탄은 100발뿐. 당초 임무는 동해안 옥계해안으로 상륙하는 적군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 앞의 적함을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근거리 속전속결을 결정했다. 적함에 가까이 다가가 함교를 명중시켰다. 동시에 적의 포탄이 조타실을 뚫고 들어와 우리군 2명이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두 사람을 사병식당내 응급실로 옮겼어. 전투를 마치고 가니 ‘적함은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묻는거야. ‘격침했다, 살아야 돼’라고 크게 외쳤지. 순간 두 병사의 눈빛이 환해지더니 고개를 떨궜어. ‘대한민국 만세’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말이야.”

 후에 대한해협해전으로 명명된 이날 전투의 승리로 부산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 정보요원 노만 존슨이 쓴 『한국작전』에선 ‘6월 25일 새벽 북한군 특수요원 600여 명이 해로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고 투입됐다. 천행으로 부산 인근 해상에서 이 위장선이 한국해군에 의해 격침됐다. 이 사건이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됐다’고 했다. 미 해군대학 교수 토머스 커틀러는 『한국전쟁과 미국 해군』에서 ‘이 전투는 유엔군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썼다.

 그로부터 60여 년. 노병에게 6·25는 진행형이다. 그의 서재는 충무공 이순신과 6·25전쟁 및 북한 관련 책들로 가득찼다. 68년 충무함 함장으로 예편한 그는 20년 전부터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으로 전국 초·중·고교에서 안보 강의를 하고 있다.

  28년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 후 고향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다. “그때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과 인민군 만행에 진저리가 났지. 남쪽으로 내려와 해사 3기로 입대했어. 겨우 되찾은 내 나라, 내 손으로 지키고 싶었어.”

 2009년 노병은 대한해협 전투에서 사망한 두 병사 가운데 유족을 찾지 못했던 한 사람, 전병익 하사관의 가족을 오랜 수소문 끝에 찾아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전하고, 정옥근 당시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가서 유족들에게 훈장을 전했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싸우다 죽어도, 다쳐도 나라와 군과 국민이 나와 내 가족을 잊지 않고 돌봐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 2002년 제2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의 영결식에 대통령도 국방부 장관도 참석하지 않았잖아. 어떻게 군인들에게 목숨 걸고 나라 지키라고 말할 수 있겠나.”

 그는 최근 정치권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에 대해 “60여 년 우리 해군이 목숨바쳐 지켜온 해상분계선을 내줄 수는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책을 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킨 전우들의 흔적을 후대에 남겨 놓는 게 늙은 내가 사라지기 전 해야 할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했어.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던 대한민국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지켜졌는지를 말이야. 노병은 죽지 않는다잖아. 사라질 뿐이지.”

글=박혜민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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