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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91> 공직 떠난 7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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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91년 청와대 압력으로 서울시립대 총장이 되지 못했던 고건 전 서울시장은 3년 후 명지대 총장이 됐다. 94년 명지대 학생들과 호프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당시 고 총장(가운데). [사진 고건 전 총리]

1990년 12월 27일 나는 서울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치를 다시 할 생각은 없었고 돌아갈 곳도 없었다. 민주자유당 전북 군산지구당 위원장 자리는 대학 후배에게 물려준 지 오래였다.

 91년 1월 서울시립대 원로 교수들이 “시장 출신이 총장을 맡아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정희채 현 총장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

 처음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교육에 열정을 쏟는 것도 보람이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2월 4일 시립대의 노춘희 도시행정학과 교수, 신홍 전 법정대학장과 나는 신임 총장 경선을 치렀다. 교수 131명이 비밀투표를 했다. 나는 68표, 신홍 전 학장은 36표, 노춘희 교수는 26표를 얻었다. 과반수 득표로 나는 최종 후보에 올랐다. 교육부 장관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형식적 절차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서택지 특혜 분양 사건이 터졌다. 투표는 끝났는데 총장 임명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다. 교육부는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시간을 끌었다. 청와대는 나에게도 압력을 가했다. 어느 날 청와대 수석 비서관 2명이 나를 직접 찾아왔다.

 “수서 문제로 서울시가 시끄럽습니다. 현직 시장도 이번 일로 물러나게 됐고, 이런 상황에서 전직 시장을 시립대 총장으로 어떻게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퇴해 주셔야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청와대 압력에 굴복했다는 오명을 남기기 싫었다. 아버지도 “절대 물러나지 말라”고 단단히 나에게 일렀다. 하지만 고민을 거듭하면 할수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원로 교수들이 나를 총장 후보로 영입한 뜻은 시로부터 보조금도 더 받고, 의과대도 신설해주고…. 시립대 발전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청와대와 각을 세운 내가 총장이 되면 시립대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내가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일을 맡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물러났다. 시립대 총장을 하면 스스로 정한 진퇴의 원칙에 어긋난다. 사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청와대의 압력에 굴했다는 불명예는 감수해야 했다.

 2월 27일 서울시립대 교수협의회에 총장 후보 사퇴서를 냈다. 53세 나이에 쓴 다섯 번째 사표였다. 내가 시립대 총장직에 당선되고도 자진 사퇴하자 외압설이 흘러나왔다. “외압에 의한 사퇴는 아니다”고 답했다. 사실 관계를 떠나 더 이상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공자는 50대를 하늘의 뜻을 아는(知天命·지천명) 나이라고 했다. 천명을 알고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그런데 나는 90년 서울시장에서 경질된 후 97년 김영삼정부 국무총리로 지명되기까지 7년을 공직과 떨어져 지냈다. 50대 황금기의 7년을 그렇게 보냈다. 내 50대는 자유롭고 외로웠다.

 대개 공직을 그만두면 정부 산하 기관장을 하거나 대기업 고문으로 갔다. 나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봉사활동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세계선린회,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에서 일했다. 김지길 목사,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서영훈 세계선린회 이사장, 신익호 목사 등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했다. 낚시도 다니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유도 즐겼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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