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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 농법으로 가꾼 건강식품 … 지지고 볶아도 진한 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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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에 심은 비닐하우스 속 오이가 이제 한창 출하 시기를 맞았다. 경기도 남양주 유기농시범단지의 조합원 이흥교씨가 오이를 수확하고 있다. 이곳의 오이는 이파리가 아주 싱싱하다. 이파리에 허옇게 농약 내려앉은 흔적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참 가까웠다. 서울 은평구에서 차를 몰아 불과 1시간 남짓, 그것도 서울 시내에서 밀린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가까운 거리다. 경기도 구리를 벗어나면서 시원스럽게 넓은 한강이 보였고, 그리고는 금방 남양주 와부읍 도곡리에 있는 유기농시범단지였다. 입구의 간판들이 말끔하다. 새로 단장한 깨끗한 단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곳 와부읍의 유기농시범단지는 지난해 봄에 개장식을 했다.

서울이 지척이니, 남양주의 농민들은 눈 높고 복잡하고 입 까다롭고 말 많은 서울이란 도시의 영향을 늘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남양주가 우리나라 유기농 채소의 중심지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서울이라는 이웃 덕분일 터다.

1 깻잎 밭의 가장자리는 온통 이끼투성이다. 농약을 쓰지 않은 밭에서 앙증맞은 우산이끼와 깻잎이 함께 자라고 있다.

입맛 까다로운 서울 사람들도 만족

비닐하우스 한 곳에서 아주머니들이 로메인·적치콘·치커리·상추 등의 쌈 채소를 수확해 포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채소가 이것저것 섞인 작은 비닐봉투를 들어 보이며 “이렇게 소포장으로 서울 가요” 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유기농 채소의 상당량은 서울시민이 구매한다.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싱싱한 채소 공급에 유리하다.

방문객도 많다. 이번 겨울부터 봄까지 딸기 따기 체험 행사에 1만 명 정도가 다녀갔다. 남양주 주민도 없지 않았지만, 역시 많은 수가 서울에서 왔다. 예쁜 딸기를 보면 아이들이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한다. 직접 딴 딸기로 딸기잼을 만들어보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울 수 있게 딸기 모종을 화분에 담아가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쌈 채소를 수확하고 고기 구워먹는 코스도 마련했다. 휴일에 돈과 시간 모두에서 크게 무리하지 않고, 알찬 가족 나들이가 될 만한 프로그램이었다. 모두 서울에서 가까우니 성사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서울의 이웃으로 살기가 그리 만만한 것만은 아니다. 1970년대 중반 팔당댐 때문에 수몰된 농민들이 정부가 내어준 남양주 두물머리 부근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90년대 중반에는 서울시에서 직접 수도권 주민의 상수원 보호를 위해 유기농을 해달라고 요청해서 유기농업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딸기와 깻잎 등 쌈 채소를 경작하고 있는, 남양주팔당친환경농업영농조합의 윤한규(51) 조합장도 그 즈음부터 유기농업을 시작했단다. “유기농으로 농사지으면 서울시에서 사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애써서 유기농을 바꿨는데, 안 사주더라고요. 무·배추 들고 서울시청 앞에서 싸우기도 했는데, 결국 안 됐어요.”

그렇다고 해서 상수원 보호구역인데 농약과 화학비료 쓰는 관행농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그 즈음부터 생협이 활성화되었다. 유기농산물 소비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고, 겨우 숨통이 트였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4대 강 사업이 문제였다. 정부의 하천부지를 빌려 썼으니, 정부가 땅을 반환하라면 당연히 내놓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모든 농업이 다 그렇지만, 특히 유기농업은 땅을 제대로 만드는 데에 4, 5년이 족히 걸린다. 농민들은 10, 20년 이상을 가꾸어온 땅을 내어놓기가 쉽지 않았다. 또 싸웠다. 해를 넘기는 지루한 싸움 끝에 대체농지로 얻어낸 것이 바로 이곳 와부읍 도곡리 유기농시범단지다. 유기농을 하던 숙성된 흙을 실어다가 이곳에 부은 덕분에 그해 곧바로 유기농 경작이 가능해졌고 2012년 5월에 개장식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다. 윤한규 조합장은 “제가 경기도 최초로 유기농 포도 인증을 받았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 포도밭이 다 4대 강 사업 부지로 수용됐어요.” 그래서 이제 포도밭이 없단다. “뭐, 섭섭하지만 어쩌겠어요.” 말끝이 흐리다.

2 윤한규씨의 퇴비더미에는 사슴벌레가 산다. 이유기농단지에서는 사슴벌레·도롱뇽 등도 발견된다. 거의 성충이 다 되어 가는 사슴벌레 유충이 졸지에 카메라 앞에 섰다.
3 남양주 유기농시범단지의 주요 작물 중 하나가 깻잎이다. 종종 구멍도 뚫려 있는 이 깻잎에서는 관행농 깻잎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하고 진한 향이 풍긴다.
4 당당하게 도열해 있는 녹즙용 케일. 줄지어 자란 케일의 이파리를 밑에서부터 깨끗이 따 출하했다. 이것이 프로의 솜씨다.

유기농 찬거리 배달하는 ‘여유농 밥상’ 사업

이 단지에는 30명의 업자가 입주해 있다. 윤 조합장의 안내로 시설재배를 하는 비닐하우스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흥교(70)씨의 비닐하우스에는 오이가 한창이었다. 3월 6일에 파종해 4월 15일 옮겨 심고, 5월 28일부터 출하했다고, 날짜까지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오이 하나를 뚝 잘라서 먹어보라고 쥐어준다. 끄트머리에는 오이꽃 마른 것이 그대로 붙어있고 오톨도톨한 표면이 손바닥을 콕콕 찌를 정도로 싱싱하다. 아작 깨무니 싱싱한 오이 향이 그대로 입에 스민다.

오이 향의 싱싱함만큼이나, 오이 이파리가 참 싱싱하고 깨끗했다. 대개 관행농으로 오이를 키우면 농약 뿌린 것이 내려앉아 이파리가 허옇게 되어 있기 십상이다. 이파리 칭찬을 해주니 여태껏 별 말이 없던 오이 주인의 입이 벌어졌다. “오이는 병충해가 심한 작물이라 농약을 많이 해야 해요. 아마 전국 어디 가서도 우리 것보다 깨끗하고 건강한 이파리 볼 수 없을 거요.” 알아주니 고맙다는 표정이다. 꼭 자식 자랑하며 흐뭇해하는 부모 같다.

윤 조합장의 비닐하우스에는 깻잎과 케일이 도열해 있었다. 척 봐도 프로의 솜씨인 줄 알겠다. 밑에서부터 깨끗하게 이파리를 따내어 삐죽한 줄기 위에서 새 이파리가 자라고 있다. 윤 조합장은 빠르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깻잎을 한 장 한 장 땄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끝이 검고 뭉툭하다. 농사 전문가의 손이다.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놀림으로’란 말은 패션에만 쓰는 말이 아니다 싶었다.

연해 보이는 새순을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와, 입 전체에 퍼지는 강한 향과 쌉쌀한 맛, 역시 유기농 깻잎이다. 관행농으로 키운 것은 크기와 색깔은 별로 다르지 않은데, 맛과 질감이 훨씬 연하고 싱겁다. 그런데 유기농 깻잎은 마치 텃밭에서 키운 것처럼 강한 향과 맛이 난다. 진짜 깻잎 맛인 것이다. 이 정도가 돼야 볶음이나 찜으로 익혀놓아도 향이 사라지지 않고 제맛이 난다.

“제일 무서운 게 유기농산물 계속 드시는 소비자예요. 관행농으로 키운 일반 채소와 유기농 채소를 그냥 입만으로도 귀신같이 알아요.” 유기농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더니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소비자’라고 답하면서 덧붙인 말이었다. “소비자가 버텨주면 어쨌든 유기농 생산자는 늘어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체험과 견학 프로그램도 만들어 운영하고 남양주 시민단체 회원들에게 텃밭 가꾸기 지도도 하는 것이다. 소비자와의 직거래로, 정기적으로 유기농 반찬거리를 배달해주는 ‘여유농 밥상’ 사업이 좀 더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는데, 지난겨울 냉해로 생산이 잠시 중단되면서 120명 회원이 절반으로 줄어든 게 가장 아쉽다고 했다.

농약 없는 환경에서만 자라는 이끼들, 그 옆에서 함께 자란 쌈 채소들로 저녁 밥상을 차렸다. 고기 생각이 조금 났지만 꾹 참았다. 그래, 오늘은 다양한 쌈 채소가 있는데 뭐 고기 따위야! 적겨자 잎과 적근대, 연한 신선초 잎까지 고루 갖추고 쌈을 먹어보기도 참 오래간만이다. 아작 씹히면서 싱싱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배불리 먹었는데도 저녁 내내 속이 편하다. 음, 고기 안 먹길 잘했지!

글=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ymlee0216@hanmail.net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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