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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퇴진과 그 명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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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과 미국사람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원체 나라가 크고 세계를 상대로 세계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영향을 주고있는 나라인 만큼 시비도 많이 듣고 또 실책도 적지 않다고 항상 논의의 대상이 되고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배우고 도움을 받고 서로 믿고 의지 삼고 있는 나라는 우리와 같은 후진국뿐 아니고 구라파 등지의 여러 선진국의 경우도 서로 비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누구보다 미국 이해>
마침 미국에서는 오는20일「닉슨」대통령이 들어서며「케네디」대통령의 뒤를 이어 5년간 집권해온「존슨」대통령이 몰러난다. 지혜와 용기가 뛰어난 젊은 대통령으로 인기가 비상했던「케네디」대통령이 암살 당한 그 불행 때문에 미국뿐 아닌 세계의 동정을 사고있는 그 뒤를 이어야하는「존슨」은「케네디」의 명성에 아니 눌릴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혹은「케네디」대통령의 지위를 빼앗은 심술장이 같은 인상도 받아왔고 그 식견이「케네디」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소문도 미국으로부터 많이 전해왔다.
그러나「존슨」대통령이 대통령에 재출마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이제 백악관을 물러나기까지의 그 업적과 경위를 돌아보면「존슨」이란 인물이 미국정치와 미국사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또 누구보다도 미국을 사랑할 줄 아는 미국 대통령다운 점에서「존슨」개인의 인물됨이 과연 배울만 한바 많고 또 그런 점에서 그는 미국이 길러낸 훌륭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고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도「케네디」와「존슨」사이는 타고나면서부터 무슨 풀릴 수 없는 큰 원한이나 가졌던 것 같이 전하고 있다.
두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은 아무리 다른 점이 많았다하더라도 대통령후보자「케네디」가 택했던 부통령후보자 그「존슨」이었다는 관계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었다. 물론「케네디」만의 뜻이 아니고 민주당의 선거대책에서 북부지방 출신의「케네디」가 남부지방의「존슨」을 부통령후보로 아니 지명할 수 없었던 관계도 있었으리라.

<출마포기 높이 평가>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의 차이는 어쨌든 간에 만일 서로 마주 앉기조차 어러울 정도로 어떤 원한이 깊었었다면 정·부통령후보로 천하를 걸고 싸우는 선거전에 같이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존슨」이「케네디」의 뒤를 이어야하는데는 여려가지 고민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이 전하는 것 같은 두 사람의 감정상 대립이나 원한 같은 것은 그후「존슨」행정부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할만큼 냉철한 것이었다.「존슨」대통령은 「케네디」대통령의 정책이자, 민주당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는데 전력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즉 1963년ll월22 일「케네디」대통령이 암살되던 날까지 아직 국회의 동의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케네디」의 3대 정책이었던 감세법안(감세법안)과 대학확장법안은 그 다음해「존슨」대통령에 의하여 국회의 통과를 보았고 민권법안(민권법안)은 재작년엔가「킹」박사가 암살된 후, 역시「존슨」대통령의 진력으로 국회통과를 보았던 것이다.
겸하여 행정부의 인사문제를 두고 말해도 국무장관「러스크」를「케네디」대통령이 임명했던 그대로 두고 오늘까지 국무를 집행해왔다. 그 외의 보좌관에는 다소 이동이 있기는 했으나 반드시「케네디」의 사람이라고 하여「존슨」이 얼마나 많이 쫓아냈던가 하면 그런 종류의 감정적이거나 정실 적인 인사처리가 있었다고 크게 논평된 바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존슨」대통령은 개인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은 결국 미국대통령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정치적 성격에 충실하는데 더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슨」의 인물을 높이 평가하여야 할 점에는 그 어느 점보다도 그가 당연히 원하면 될 수도 있었던 작년의 대통령중임을 위한 출마를 깨끗이 포기한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기는「케네디」의 뒤를 이어 나가기에는 그 인기가「케네디」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말하면서 마침내는「베트남」전쟁 때문에 더 인기가 떨어져서 대통령자리에서 마치 밀려난 것 같이 말하기도 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이다.「존슨」대통령의 인기는 한때 의외에도 높았다.

<국론의 분열 막아내>
미국경제면에서 볼 때에 2년 이상이라는 번영의 기록이 지속된 일이 어느 대통령시대에 있었던가 하는 것이 미국경제학자들의 일치된 관찰이었다. 그는「위대한 사회」(그레이트·소사이어티)를 내세웠다.「위대한 사회의「비전」에 관해서 그는 한번도 이렇다할 구체적 설명을 한 바도 없었으나, 미국 국민들 사이에는 한때「존슨」대통령치하의 순조로운 경제적 번영 속에「그레이트·소사이어티」를 예찬하며 미국의 전진의 구호로 삼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월남전쟁 때문에「존슨」의 인기가 자못 떨어졌다는 것도 사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월남전쟁의 시초는「존슨」때도「케네디」때도 아니「아이젠하워」대통령 때부터였다.
그것도「아이젠하워」정부의 독단이라기보다는 미국이 밟아온 전통적인 태평양정책의 역사적 결론이 미국으로 하여금 월남에 군사적 개입을 아니치 못하게 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이 월남 (당시는 인도차이나)군대를 진주시킨 데서 비로소 미국이 태평양전쟁의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나 마찬가지 결론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월남전으로 인한 방대한 소모와 미국국내의 여론의 반발 또 세계적 여론을 미국은 신중히 고려치 않을 수 없었나. 그렇다고 미국이 무조건 월남에서 철수할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미국 정치지도자중에 하나도 없었다고 할 것이다. 누구나 오직 명예로운 철수와 평화의 보장을 원했을 뿐이었다. 이런 경우에「존슨」이 차기대통령 출마를 단념치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대통령에 재출마함으로써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미국 국론의 분열을 그 이상 조장시키는 큰 말썽거리가 되게 해서 나라에 손실을 끼칠 수 없다는데 그 큰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이야말로「존슨」이란 인물의 그릇이 결코 작지 않고 또 미국의 정치가 얼마나 건전한 상식과 전통 위에 서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존슨」퇴진의 역사적 명예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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