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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변의 저의|「스웨덴」월맹승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중립국「스웨덴」이 10일「하노이」정권을 승인한 것은「하노이」의 국제적 위신을 향상시킴은 물론, 미국과「사이공」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불의의 충격에 위신이 깎인 미국은 굳이 그 영향을 짐짓 과소 평가하려는 노력으로,「스웨덴」의 움직임으로「하노이」승인을 고려하게될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실추된 위신의 회복을 꾀했다.

<연쇄반응 불가피>
그러나「스웨덴」의「하노이」승인은 북구제국들로 하여금 이에 동조할 것을 필연적으로 검토케 하는 연쇄반응이 불가피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독일등 분단된 국가들에도 심리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독·북괴 등도 외교승인을 얻으려는 외교노력에 한층 박차를 가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종래 월남참전을 거부하는 미 탈주병들의 망명을 허용하기도 하고, 미국의 월남정책을 격렬히 비난하는 등 항상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그런데「스웨덴」은「닉슨」정부취임 열흘을 앞둔 이 시점에「하노이」를 승인하고 이어「쿠바」에도 대사관을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스웨덴」은 그 이유를 공식적으로는『「파리」회담이 평화와 월남의 장래를 위해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으며, 전후 원조계획에 관련하여 양국의 접촉이 구체적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이런 이유에 곁들여,「존슨」이 곧 물러서고「닉슨」정부가 들어서면「닉슨」은 이를 기정사실 인로 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참작된 것 같다.
「스웨덴」은 57년「방콕」주재「스웨덴」대사를 주「사이공」대사도 겸임케 했으나 67년 주「방콕」대사 경질 때「사이공」주재 겸임을 발령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사이공」과는 단교 상태에 있었다.「스웨덴」이 이번「하노이」와 전면적인 외교관계를 모색케 된 계기는65년2월의 북폭 이었다.

<월남관 단교상태>
무장중립으로 자국의 독립을 티없이 수호하려 하는「스웨덴」은 타국의 독립문제에도 민감했다. 더우기 높은 국민소득과 고도의 사회보장이 이룩된 나라인 만큼 인권의식도 투철하다.「스웨덴」사람들의 눈에는 북폭도 월맹주민에 대한 주권의 침해행위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월남전에 관련한 반미여론은 거침없이 비등했다.
그리하여「드골」도 허용 않던 월남전범 재판의「스톡름」에서의 개최를 허용하홀고「에들란데르」「스웨덴」수상은 방미중 「러스크」미 국무장관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66년「FP나르트·페트리」주북평「스웨덴」대사는「하노이」를 방문, 비공식접촉도 가졌다. 67년에는 주「방콕」「스웨덴」대사의「사이공」주재 겸임도 해제하더니, 68년 3월21일에는『월남전이 공산주의자들의 동남아 정복의 일환이란 미국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존슨」정권의 정책은「스웨덴」의 민주주의와는 상용하지 않는다』는 격렬한 대미비난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3월31일 부분 단폭 후에「스웨덴」은 월남민족해방전선의 홍보부 상설기구의「스톡홀름」에의 설치를 인정하고 6월에는 월맹병원 건설원조를 약속하는 등「하노이」접근을 강화했다.

<서방·월맹 첫 결연>
뒤이어「스웨덴」과「하노이」의 외상이 서로 상대국을 방문하는 등 교류에서「닐손」「스웨덴」외상은『「하노이」승인이 가까웠다』고 예고한바있다.
금년1월10일「스웨덴」은 마침내「하노이」와 몇 년간의 교제 끝에 결연된 셈인데 중립국「스웨덴」의 입장으로서는, 이는「하노이」측의 국제적 지위를 부당하게 향상시켜주는 것으로만 생각 될 수는 없다. 승인의 저의가운데는 통상을 위한 경제적인 측면도 엿보이나 「파리」회담의 양 당사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어야 장차 중개역할을 원활히 할 수 있다는 중립국의 생리가 그대로 노출된 것으로 생각되고있다.「하노이」정권은 지금 공산국가12개국, 아아14개국이 승인하고 서방측에는「파리」에「하노이」의 유일한 총 대표부가 있으나 서구의 한 모퉁이에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갖기는「스웨덴」이 처음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 의미에서 「파리」회담의 진전에서 「파리」정부의 역할이 다소 빛을 잃을 것도 예견된다. <이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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