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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커피 마시다 녹차 잊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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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 주말 녹차의 수도로 불리는 전남 보성군의 대한다원 녹차밭을 찾았다. 4월 하순께(곡우) 첫잎을 따낸 녹차밭에선 다시 돋은 새순이 초록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새순을 따는 일손은 찾아볼 수 없었고 지난겨울 한파에 누렇게 얼어 죽은 녹차나무 흔적만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또 몇 해 전 영화·TV 광고 등의 촬영 명소로 입소문이 나면서 주차장을 가득 메웠던 관광객도 온데간데없었다. 대한다원 주용로 공장장은 “요즘 녹차 소비가 줄어 전체 60만 평의 녹차밭 중 40만 평을 방치해 두고 있다”며 “관광객도 확 줄어 가끔 사진 찍는 사람만 찾는 정도”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녹차가 커피에 완전히 밀리면서 잊혀진 존재가 돼 버렸다”며 “요즘 녹차 농가에는 한파보다 더 무서운 게 커피”라고 말했다.

 최근 커피가 호황을 누리고 메밀차·마테차 등 건강 기능성 차까지 잇따라 출시되면서 녹차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녹차는 2004년만 하더라도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3곳에서 한 해 1667억원어치가 팔렸다. 하지만 지난해 판매액은 663억원어치가 전부다. 커피를 제외한 전체 차 제품 중 녹차의 판매 비중도 한때 90%(2004년)에 육박했지만 지난해에는 51%로 뚝 떨어졌다.

 이에 따라 보성군에서는 한때 1100㏊에 육박하던 녹차 재배지가 지난해 1063㏊까지 줄었고 1500t을 넘나들던 녹차 생산량도 1200t을 밑돌고 있다. 하지만 녹차 재배지 감소보다 더 심각한 것은 대한다원처럼 방치되는 녹차밭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치된 녹차밭은 정부의 통계상에는 재배지로 잡히지만 실제로는 녹차 농사를 포기한 땅이다. 보성군의 한 관계자는 “보성군 내 전체 차밭의 30% 이상이 방치되고 있고 해마다 방치 면적이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원예산업과의 한 관계자는 “보성은 물론 보성과 함께 3대 녹차 생산지로 꼽히는 경남 하동이나 제주 등에서도 밭은 그대로인데 잎을 따지 않는 녹차밭이 계속 늘고 있다”고 말했다. 녹차 농가들 사이에서 수년 전부터 “매년 축구장 100개 정도의 녹차밭이 사라지고 있다”는 한탄이 나오는 이유다. 보통 산비탈에 위치한 녹차밭이 방치될 경우 잡초가 무성해져 다시 녹차 수요가 살아나도 좋은 품질의 찻잎을 수확하기가 어려워진다.

 녹차는 1990년대 들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소비자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비만이나 암 예방 효능이 알려지면서 90년대 후반부터는 생산량이 증가했다. 실제로 2002년 518㏊의 녹차밭에서 960t을 생산하던 보성군은 2006년에는 1111㏊에서 1572t을 생산했다. 전국적으로도 2008년 3774㏊의 재배지에서 3936t이 생산될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녹차는 급격히 추락한다. 먼저 농약파동이 결정타였다. 당시 녹차 소비가 크게 증가하자 중국에서 수입량이 급증했다. 이 중 농약 성분이 남아 있는 녹차가 섞여 들어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녹차 전반으로 소비자의 불신이 확산된 결과다. 또 커피와 달리 마시는 절차가 복잡하고 마신 뒤에는 찌꺼기가 남는 등 녹차가 간편함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따라가지 못한 측면도 있다. 고려대 생명공학연구소 오미정 교수는 “농약이 과다 사용된 녹차가 유통되면서 신뢰를 잃었고 때마침 다국적 커피까지 잇따라 들어와 외면받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커피는 파죽지세다. 관세청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커피 수입량은 계속 증가세다. 2011년에는 수입량이 13만t을 돌파했다. 이를 커피잔으로 환산하면 18세 이상 전체 성인 남녀가 연간 338잔을 마셨다는 계산이 나온다. 거의 모든 성인 남녀가 하루 한 잔을 마신다는 얘기다. 글로벌리서치기관인 닐슨컴퍼니에 따르면 커피믹스 시장이 1조2000억원, 커피 음료가 9000억원, 커피전문점 시장이 1조원대로 커졌다. 반면 대형마트 등을 포함한 전체 녹차 시장 규모는 커피의 10분의 1 수준인 2000억~3000억원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이쯤 되면 녹차가 커피에 완패한 셈이다. 보성에서 만난 한 녹차 생산자는 “요즘은 햇녹차를 싸들고 절에 가도 스님들이 녹차는 쳐다도 안 보고 커피만 찾을 정도”라고 한탄했다. 차 문화를 대변했던 사찰에서까지 차 대신 커피를 마실 지경에 이르렀다는 푸념이다.

보성=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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