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한·미·중 공조 때마다 대화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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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이번엔 기습적으로 미국에 회담을 제안했다. 남북회담이 무산된 지 닷새 만인 16일 오전 김정은이 제1위원장을 맡고 있는 국방위원회 대변인의 ‘중대담화’ 형식이었다.

 북한은 담화에서 “조선반도의 긴장국면을 해소하고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이룩하기 위해 조(북한)·미 당국 사이에 고위급 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의제로는 ▶군사적 긴장완화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미국이 내놓은 ‘핵 없는 세계 건설’을 제시했다.

 “회담 장소와 시일은 미국이 편리한 대로 정하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북한의 전격적인 제안은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오는 27일 베이징에서 북핵 문제 등에 대한 공조 방안을 협의하기 열흘 전에 나온 것이기도 하다.

 중국에 대해선 “우리를 소홀히 한다면 미국으로 접근하겠다”(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한국엔 “남한을 건너뛰고 북·미 대화를 바로 추진할 것”(통일부 당국자)이란 메시지를 보내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딘지 설익어 보이는 부분도 많다는 게 당국자들의 평가다.

 우선 오바마 행정부의 기류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다. 이날 북한은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우리 수령님(김일성)과 우리 장군님(김정은)의 유훈이며 우리 당과 국가와 천만군민이 반드시 실현하여야 할 정책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핵 보유국으로서 우리의 당당한 지위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 보유국 지위를 누리겠다 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회담을 제안한 셈이다.

 이런 북한의 기조는 무엇보다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지난 7~8일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데 합의한 것과 원천적으로 배치된다. 당장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 케이틀린 헤이든 대변인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준수를 강조하며 “우리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북한을) 판단할 것”이라는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또한 미국에 회담제안 카드를 던지면서 미국을 ‘전후 60년 세월 조선정전협정을 체계적으로 파괴한 주범’ ‘집요하게 책동하고 있는 전쟁방화범’ 등으로 묘사했다. 북한이 앞뒤가 맞지 않는 요구까지 포함하면서 전격적인 카드를 잇따라 내놓고 있는 것은 한·미 양국은 물론 중국까지 비핵화를 압박해오는 데 대한 김정은의 초조감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익명을 원한 정부 당국자는 “사실 중국에 대한 특사파견→남북대화 시도에 이어 북·미 대화 직접 추진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달 24일 이후 강원도 원산의 특각(전용 호화별장)에서 장고를 거듭했던 대외전략 일정표대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노련함이 선대에 비해 떨어지는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최근 북한의 잦은 고위 장성급 인사교체와 맞물려 평양 권력핵심부 간에 외교전략 조율이 원활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올 정도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미 대통령이 지난달 7일 워싱턴에서 ‘북핵 불용과 한·미 동맹 강화’에 의기투합하자 김정은 제1위원장은 최측근 최용해(총정치국장)를 베이징에 특사로 파견했으나 의도대로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오바마·시진핑이 경고를 보내기 직전엔 우리 정부에 당국대화를 하자고 밝혀왔지만 당국대화 카드 또한 북한 입장에선 상황을 호전시키지 못했다.

 일각에선 또 다른 도발을 위한 명분쌓기용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 담화가 미국을 ‘전쟁방화범’ ‘날강도적인 침략자’ 등으로 비난하고 있어 회담성사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천명하는 쪽에 무게가 실린 듯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은 일단 북한이 공개적으로 대화를 요구하고 나선 만큼 당장은 이런 기조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이번의 공개제안 이후에도 뉴욕채널 등 비공개 라인을 통해 북한의 대미접근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도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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