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통미봉남 새판 짜기 … 미국은 "말보다 행동" 싸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북한이 16일 북·미 고위급 회담을 제안하고 나서면서 향후 남북관계에 미칠 파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남북 당국회담 개최(12~13일·서울)에 합의하고도 수석대표의 급(級)을 둘러싼 기싸움으로 무산된 직후 대미 접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에서다. 북한이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남한을 제쳐둔 채 미국과만 대화하려는 것)’ 전술을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남북대화를 ‘워싱턴(북·미대화)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여겨온 북한이 남북회담의 판을 깨버린 채 곧바로 미국과 상대하려는 것이란 얘기다. 북한 국방위는 회담을 제안하는 ‘중대담화’를 통해 “사대와 굴종에 체질화된 남조선의 현 당국자들과 여러 추종세력들이 같이 춤추고 있다”고 우리 측을 비난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2월 북·미 고위급 회담 합의를 두 달 만에 깨트리고 장거리 로켓을 쏘는 등 도발 일변도로 나선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쾌한 기억이 또렷하다.

북한도 이런 분위기를 고려한 듯 북·미 고위급 회담 제안에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담화에서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론 회담의 ‘장소와 시일은 미국이 편리한 대로 정하라’는 등 유화 제스처를 담은 것이 그중 한 예다. 외무성이 아닌 국방위를 내세운 점도 눈길을 끈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책임자로 있는 ‘국가기구’인 국방위를 통해 제안함으로써 무게를 실어보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북한은 앞서 남북 당국대화를 제의하면서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외곽단체로 간주되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통해 담화를 냈다. 둘 다 ‘특별담화’ ‘중대담화’ 등으로 이름 붙이고, 현충일이나 워싱턴의 주말을 택한 점도 제안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키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회담 제안을 하면서 ‘위임에 따라’라는 표현을 써 최고권력층의 의중이 담긴 것이란 점을 강조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등의 주문을 곁들였다.

 정부는 북한이 일단 서울과 워싱턴을 겨냥한 두 개의 회담판을 펼쳐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워싱턴 현지 반응은 싸늘하다. 미국이 휴일인 토요일 오후에 나온 북한 제안에 대해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 케이틀린 헤이든 대변인은 비핵화 원칙과 함께 “신뢰할 만한 협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헤이든 대변인은 16일 성명을 통해 “우리는 언제나 대화를 선호해 왔으며, 북한과 공개 연락망이 있다”면서도 ‘말’보다 ‘행동’을 요구했다. 워싱턴포스트(WP) 등 미 언론도 실제 회담이 성사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봤다.

  북한이 또 하나의 회담판인 서울 당국회담 테이블로 돌아올 가능성은 아직 미지수다. 남북회담 무산의 요인이 된 수석대표 급 문제는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해온 개성공단 입주업체의 피해를 덜어주기 위한 대북접촉은 마냥 미뤄두기 어려운 상황이다. 통일부는 이미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아닌 다른 고위 인사라도 ‘장관급’에 해당한다면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상대로 받아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북에 던졌다. 회담 추진에 관여한 당국자는 “북한이 퇴짜맞은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장과 김양건 사이에서 답을 찾는다면 회담은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관련기사
▶ 北 최용해, 中에 군사훈련 제안했다 거절당해
▶ 북, 한·미·중 공조 때마다 대화카드
▶ 청와대는 "미국 대응 지켜볼 것"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