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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84> 남산 제 모습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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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남산의 경관을 해쳤던 외인아파트 2개 동이 1994년 11월 20일 오후 3시 발파 해체 공법으로 철거됐다. 서울시에서 추진한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의 일환이었다. [중앙포토]

남산은 서울 사람뿐 아니라 한국인에게 고향의 앞산같이 소중한 곳이다. 그런 남산에 일제는 총독부와 신궁을 지었다. 남산의 수난은 해방 뒤에도 계속됐다. 난개발로 각종 콘크리트 구조물이 남산을 잠식했다.

 ‘남산을 시민에게 돌려줄 수 없을까’. 관선 서울시장으로 일하며 갖게 된 소망이었다.

  “남산에 다녀왔다”고 하면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고문받고 왔다”고 알던 시절이다. 남산이 그런 상징으로 남게 둘 순 없었다.

 1989년 말 서울 신라호텔의 한 방에서 나는 서동권 안기부장과 만났다. “안기부의 성격상 일반 시민들과는 좀 떨어져 있는 곳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리적으로 지금 남산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안기부 신청사를 지을 만한 서울 시내 근교 부지를 물색해뒀습니다. 안기부장 공관도 함께 이전하는 것이 어떨까요.”

 서 부장은 내가 전남도지사로 일하던 시절 광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를 지냈다.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마침 안기부도 좁은 건물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 내곡동 등 몇 개 이전 후보지를 그에게 추천했다. 얘기는 상당히 잘 진행됐다.

 하지만 수도방위사령부, 대한주택공사, 외국공관 등 남산 복원을 위해 설득해야 할 기관은 더 있었다. 사업에 추진력을 얻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90년 어느 날 이동(李棟)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에게 “시정연구관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주택공사 강홍빈 주택연구소장을 추천했다. 강 소장은 미 하버드대와 MIT에서 수학한 도시 전문가였다.

 “아, 미국 보스턴에서 내가 한 번 본 적이 있지. 근데 여기 월급이 얼마 안 되는데 오겠어?”

 “주택공사보다는 훨씬 적을 겁니다. 그래도 올지 모릅니다.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얼마 후 그를 직접 만났다. “난 문화적 소양이 부족하다. 나와 같이 서울시에서 일하자”고 설득했다. 이동 본부장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일 욕심 하나로 서울시 시정연구관이 됐다.

강홍빈

90년 6월 남산 복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강홍빈 연구관이 기획하고 추진했다. 그는 이 사업에 ‘남산 제 모습 찾기’란 이름을 붙였다. ‘남산 제 모습 찾기 100인 시민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90년 10월 사업의 네 가지 큰 방향을 정했다. 첫째, 남산 잠식시설을 옮기거나 철거한 뒤 그 자리를 공원화하고 둘째, 남산의 생태환경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셋째, 역사적 가치가 있는 봉수대와 성곽을 복원하고 넷째, 남산 주변 난개발을 막고 산 안의 보행로를 가꾸기로 했다.

 여론의 반응은 뜨거웠고 환영받았다. 하지만 ‘과연 실현될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남산 사업이 막 무르익어갈 때 나는 수서택지 특혜 분양 압력을 거부하다 서울시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강홍빈 연구관은 남아 100인 시민위원회와 함께 계획을 진전시켰고 관련 부서들이 이어받아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94년 11월 20일 외인아파트는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

민선 서울시장으로 돌아와서 보니 외인아파트 자리가 공터로 남아 있어 야생화공원으로 만들었다. 안기부 건물은 서울의 안전을 책임지는 서울종합방재센터·소방재난본부·도시안전본부 등으로 탈바꿈했다. 안기부장 공관은 문학의 집으로 바뀌었다. 수방사 자리엔 한옥마을이 들어섰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남산 복원 실무 맡았던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

강홍빈(68)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서울시정개발연구원(현 서울연구원) 원장을 거쳐 서울시 행정1부시장을 지냈다. 강 관장은 “남산 제 모습 찾기란 거대한 그림은 1990년 시작됐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 남산 제 모습 찾기 100인 시민위원회는 어떻게 구성했나. 100명은 많은 인원인데 운영하기 어렵지 않았나.

 “정확히는 103명이다. 시의회도 없고 시민단체 활동도 미약하던 시절이다. 하향식 지시 행정의 틀을 벗어난 시도였다. 김원용 박사가 위원장을 맡았다. 전문가는 물론 남산 자락에 사는 주민, 유치원 교사, 인근 학교 교장 등 다양한 사람이 참여했다. 100인이 다양한 의견을 냈고 역동적이고 멋있게 운영됐다.”

- 남산 복원 사업을 할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남산 군인아파트를 허물고 새 아파트를 짓는데 15층 고층으로 지으려고 했다. 내가 반대하니 시행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칼을 들고 사무실로 쳐들어오더라.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출신인 김병린 사장이 시공사 대표였는데 “내가 접을게”라고 하셨다. 너무 고마웠다. 결국 남산 경관을 해치지 않는 저층 아파트가 지어졌다. 그렇게 지켜낸 남산인데 지금 주변에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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