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후드세, 금융시장 의적일까 악당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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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중세 영국의 ‘의적(義賊)’ 로빈 후드는 포악한 관리와 욕심 많은 귀족·성직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로빈 후드와 같이 주로 부자들이 이용하는 주식·채권·선물·옵션 등 금융 거래에 세금을 매겨 서민 복지 재원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금융거래세(일명 로빈후드세)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08년 국제 금융위기 이후 더 거세졌다. 로빈후드세는 외환 거래에 세금을 매기는 토빈세와 달리, 외환을 포함한 모든 금융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는 데다 금융시장 안정과 함께 재원 확보를 노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독일·프랑스 포함 11개국 “복지재원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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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모펀드나 투자은행들은 선진국의 낮은 금리로 막대한 돈을 빌린 뒤 주식·선물·옵션 등 금융상품에 거액을 투자해 이익을 얻는 과정에서 전 세계 금융시장을 교란시켜 왔다. 특히 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국가들은 투기 자본의 급격한 자금 유·출입에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1997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은 것도 국내 금융시장에 거액을 투자했던 국제 투기자본이 일시에 자금을 빼낸 것이 주요인으로 꼽혔다. 로빈후드세 지지자들은 이 제도를 도입하면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한편, 세금을 더 걷을 수 있어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 말한다. 반면 반대자들은 로빈후드세가 금융 거래를 위축시켜 금융 실업자를 양산하고 세금도 기대만큼 거둘 수 없다고 주장한다.

 로빈후드세 도입 논의가 활발한 곳은 유럽이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오스트리아·벨기에·슬로베니아·슬로바키아 등 11개 유럽연합(EU) 회원국은 27개 EU 회원국 전체에 금융거래세를 도입하자고 2011년 제안했다. EU 집행위원회도 내년 1월부터 주식·채권 거래금의 0.1%, 선물·옵션 등 파생상품 거래금의 0.01%를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를 도입할 경우 27개 회원국이 추가로 거둘 수 있는 세금이 연 571억 유로(약 86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세계 2위의 금융시장이 있는 영국이 100억 유로로 가장 많은 세수를 올릴 것으로 예상됐다. 금융거래세 도입에 찬성하는 11개국만 도입해도 연 세수가 350억 유로에 이를 전망이다.

 가장 적극적인 게 프랑스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독자적으로 0.2%의 금융거래세를 신설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 1억7000만 유로의 금융거래세를 거둔 데 이어 올해 3억 유로의 추가 세수를 기대하고 있다. 경제 부진으로 세수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거래세는 프랑스 서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 등도 세수 확보를 위해 금융거래세 도입에 적극적이다.

투기 막아 금융 안정 … 소로스·버핏도 찬성

 반면 영국·스웨덴·룩셈부르크 등 8개국은 반대하고 있다. 금융 비중이 큰 영국의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EU 집행위원회가 내년 1월 금융거래세 도입에 찬성하는 11개국을 대상으로 이 제도를 실시할 경우 이들 국가와 거래하는 영국 금융회사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며 유럽사법재판소(ECJ)에 EU 집행위원회를 제소했다.

스웨덴은 EU 27개 회원국만의 금융거래세 도입에 반대한다. 스웨덴이 1984년 금융거래세를 도입했더니 금융자본의 절반 이상이 스웨덴에서 영국으로 떠났던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90년 이 제도를 폐지했다.

 미국에서도 금융거래세 도입 논의가 있으나 월가의 로비에 막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미 연방 상·하원에서는 주식·채권·파생상품 등의 거래에 0.025~0.1%의 세금을 매기는 법안이 제출되고 있으나 법안 통과에 필요한 충분한 표를 얻는 데 실패하고 있다. 미 정부는 금융거래세가 미국이 강점이 있는 금융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부정적이다.

 한국은 주식 매도 금액의 0.3%를 증권거래세로 거둬들이는 등 부분적으로 금융거래세를 도입하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금융 거래 과세를 강화할 방침이다. 정부는 지난달 말 열린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선물·옵션 등 파생상품 거래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기고, 주식 양도차익 과세 대상 대주주의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영국 등 8개국 “금융 실업자 양산” 반대

 경제학자들은 전반적으로 금융거래세 도입에 찬성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프린스턴대 교수)과 조셉 스티글리츠(컬럼비아대 교수), 제프리 색스(컬럼비아대 교수). 장하준(케임브리지대 교수) 등 경제학자들은 투기자본이 국제 자본시장을 교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금융거래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영국 파운드화 투기로 이름을 날린 조지 소로스와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도 금융거래세에 긍정적이다.

 월가와 런던 금융가는 국제 금융시장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된다며 반발한다. 영국 경제학자 팀 콘든은 금융거래세가 실시되면 영국 금융 부문에서 1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월가에서는 금융거래세 도입으로 금융기관의 일자리가 10% 줄고 소매·서비스·요식업의 일자리도 1% 이상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 상공회의소는 금융거래세로 인해 다우지수가 12.5% 떨어질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의 경제 저술가 팀 워스톨은 금융거래세가 도입되면 금융기관들이 그 부담을 소비자에게 떠넘기고, 금융 거래 감소로 인해 세수가 예상만큼 걷히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재홍 기자

◆로빈후드세=주식·채권·외환·선물·옵션 등 금융상품 거래에 부과하는 세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무분별하고 위험이 큰 금융상품 거래를 제한하고, 금융회사의 과도한 돈 잔치를 억제하며, 복지 재원 마련을 위해 제안되고 있다. EU는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금융거래세 도입을 제안했다. 이 제도는 일부 국가에서만 실시하면 국제 자본이 제도가 없는 곳으로 이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시행해야 효과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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