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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국문학 기대작 장편 『28』의 정유정 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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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유정의 소설은 생생하다. 속도감 때문만은 아니다. 치밀한 묘사 때문이다. 영화계에서 그의 작품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다. 그는 “시체를 묘사한다면, 독자의 품에 시체를 안겨주고 싶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근 우리 문단에 이런 일도 드물었던 것 같다. 한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일이…. 등단 이후 네 번째 장편일 뿐인데.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뜻이리라. 2년 전 『7년의 밤』으로 한국문학을 이끌 새로운 주자로 떠오른 소설가 정유정(47) 얘기다.

그의 신작 『28』(은행나무)이 베일을 벗었다. 올 한국문학 최고 기대작으로 꼽히던 이 작품은 ‘능수능란한 이야기꾼 정유정’을 인증하는 확인서였다. 탄탄한 이야기만큼이나 생명에 대한 묵직한 질문도 가볍지 않게 다가온다.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초토화된 서울 인근의 소도시 화양. 봉쇄된 도시에서 벌어진 28일간의 무간지옥을 그린다는 소설의 얼개가 알려졌을 때 사실 고개를 갸웃했다. 전염병을 소재로 한 이야기란 기시감 때문에 작가의 입장에서 패를 미리 까고 시작하는 불리한 게임으로 여겨졌다.

봉쇄된 도시 ‘화양’의 아비규환 28일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기우였다. 재난 스릴러의 전형적 문법에서 벗어난 소설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극한으로 몰아치는 그의 장기는 마지막까지 독자를 팽팽하게 끌어당겼다. 책의 출간을 이틀 앞둔 12일 그를 만났다.

 -전염병을 다루기가 부담스럽지 않았나.

 “부담은 전혀 없었다. 괴질을 무찌를 백신을 찾은 영웅담을 쓰는 게 아니었다. 전염병은 그저 도시를 봉쇄하는 극단적 상황을 위한 장치였다. 자신 있었다.”

 인물과 독자를 극한으로 몰고 가는 그는 모질고 매정했다. 어설픈 낙관은 설 자리가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몰고 가나.

 “삶의 비극이나 희극은 모두 선택에 의한 거다. 인물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것은 인물의 선택이다. 압력이 극에 달했을 때 하는 선택이 그 인물을 보여주기 때문에 극단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거다.”

 작품을 쓰면서 그는 자신도 극한으로 몰았다. ‘골방 체질’ 답게 2011년 11월 전남 신안군 증도에 틀어박혀 한 달 만에 초고를 썼다. ‘뮤즈’가 찾아온 듯 내달렸다. 하지만 두 달여 취재를 마치고 퇴고 작업에 들어갔을 때 길을 잃었다. 슬럼프였다. 이야기가 맘에 안 들고, 낯설었다.

 둘도 없는 친구인 영화감독 안승환에게 SOS를 쳤다. 그의 작품을 가장 먼저 모니터하고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맨주먹으로 링 위에 올라가는 데 자기는 망치 들고 올라와서 두들겨 패는 스타일’의 친구가 초고를 읽고 그에게 강펀치를 날렸다. “철학하고 싶으면 철학서 쓰고, 의학 논문을 쓰려면 의대 가고, 언어로 예술을 하고 싶으면 시를 쓰라”고.

 충격이 컸다고 했다. 다 싸 짊어지고 지리산 자락 해발 700m의 암자에 처박혔다. 그게 지난해 6월 초였다. 앉아서 뭐가 문제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증도·지리산 틀어박혀 쓰고 또 썼다

 “문단에서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걸 의식했구나 싶었어요.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문단의 통념에 비춰볼 때 그는 좀 특이한 존재다. 간호대를 졸업한 뒤 간호사 등으로 일하다 작가가 된 그는 대학의 국문과나 문예창작과 출신으로 신춘문예나 문예지로 등단한 ‘정식 코스’와 거리가 있다. 2007년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기까지 공모전에 11번이나 미끄러졌다. “개나 소나 다 문학한다고 덤비는 현실이 슬프다”고 했던 한 심사평을 보고 끙끙 앓아 눕기도 수 차례였다.

 2009년 『내 심장을 쏴라』로 제5회 세계문학상을 받은 뒤 등단 4년 만에 내놓은 『7년의 밤』이 30만 부 가량 팔리며 인기 작가가 됐다. 그럼에도 장르 문학의 색채가 강했던 그의 작품에 대한 문단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원인을 파악하자 바로 해결에 나섰다. 자신이 하고 싶고 쓰고 싶은 것을 생각했다. 초고를 버렸다. 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이 휩싸고 새벽이면 어둠 같은 안개가 내려앉는 지리산 자락에서 귀신과 살며 쓰고 또 썼다. 매일 16㎞를 걸었다.

 “장편소설을 쓰는 건 체력전이에요. 내가 힘이 세야 이야기를 장악하고 내가 만든 세계에 인물을 풀어놓고 조절할 수 있거든요. 심신이 미약하면 편한 길로 가려 해요. 산을 뚫어야 하는 데 길을 돌아가는 거죠. 힘이 없으면 캐릭터가 제멋대로 돌아다녀요.”

 어찌 보면 그를 지치게 한 건 자초한 바다. 이번 작품은 6개의 시선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다중 플롯의 작품이다. 5명의 인물과 개 한 마리의 시선으로 전체의 큰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건 늑대개인 ‘링고’의 시선으로 내면과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소설의 주제를 독자에게 설득시키려면 링고에게 공감할 필요가 있어서다.

구제역 당시 소·돼지 살처분에서 착상

 “화양시에 괴질이 발병하자 정부는 계엄령에 준하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도시를 봉쇄하죠.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그곳을 버리는 셈이에요.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는 데 동물을 살처분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질문을 던지기는 쉽지 않았어요.”

 -괴질을 인수공통전염병으로 설정한 이유인가.

 “구제역이 창궐했을 때 소와 돼지가 살처분되는 모습을 보며 이 소설을 구상했다. 사람들이 도구적 가치로만 따지는 가축과 동물의 삶과 죽음을 인간이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만약 사람과 개가 같은 전염병에 감염됐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를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28일, 무저갱(無底坑) 같은 화양의 시간은 인간의 광기가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지 시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는 이 시간을 건조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괴질이라는 불볕이 지나간 화양은 폐허가 되요. 그곳의 28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에요. 밖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고, 괴질에도 대처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 속에 삶은 너무나 폭력적이라는 것, 그게 참 슬프죠.”

 그는 “소설을 쓰는 건 알래스카에서 꽃삽을 들고 도시를 만드는 것처럼 어렵다”고 했다. 동토의 땅에서 그가 힘들게 피워낸 꽃이 독자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는 다시 새로운 꽃삽을 들고 새 씨앗을 뿌리기 시작할 것이다.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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