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져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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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SI.com의 월드컵 분석가 가브리엘 마르코티가 '91분' 칼럼을 통해 월드컵 대회 기간에 매일 매일의 경기 내용을 상세히 보도한다.

개최국 한 곳(일본)은 탈락했지만 다른 개최국(한국)은 눈부신 골든골로 이탈리아를 2-1로 누르고 8강 고지에 우뚝 섰다. 알렉스 델 피에로는 대중의 요구에 힘을 얻어 화요일 이번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장했다. 크리스티엔 비에리, 프란체스코 토티와 함께였다. 이로서 양 팀은 모두 공격수를 세 명씩 두게 됐다. 거스 히딩크는 평소대로 안정환을 가운데에 둔 3-4-3 진용을 고집했다.

대전의 대규모 관중에 힘은 얻은 한국은 꿈을 실현하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탈리아 수비가 한국 선수의 셔츠를 아주 심하게 잡아끌자 에콰도르 주심 바이론 모레노가 페널티킥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안정환(공교롭게도 그는 세리에A 페루자에서 뛰고 있다)의 킥을 수문장 잔루이지 부폰이 막아냈다. 분위기가 반전되는 순간이었다. 18분 크리스티엔 비에리가 코너킥을 헤딩한 공이 골문 그물을 가르며 이탈리아는 앞서가기 시작했다.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이끄는 이탈리아는 37분 프란체스코 토티의 멋진 플레이가 다미아노 토마시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며 2-0으로 만들 뻔 했다. 그러나 골키퍼 이운재는 수비진에 앞서 놀라운 수비력으로 위기를 넘겼다.

휴식 후 한국 팀은 불이 붙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델 피에로를 빼고 젠나로 가투소를 투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한국은 계속해서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종종 위험한 상황을 연출했다. 히딩크는 차두리와 황선홍을 투입하는 도박을 걸었고 둘의 가세로 한국의 공격력은 더욱 강화됐다.

종료 2분 전 드디어 이탈리아가 쓰러졌다. 설기현이 크리스티엔 파노치가 잘못 걷어낸 공에 달려 들어 골을 성공시켜 1-1 동점을 만든 것이다. 곧 이어 비에리가 골문 앞이 열린 상태에서 슛을 했으나 멀리 빗나가며 승리의 기회가 날라갔다. 그리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동점골에 힘을 얻은 한국은 파상공세에 나서 여러 번의 기회를 만들어 내며 이탈리아를 계속 압박했다.

이탈리아는 연장 전반 종료를 앞두고 토티가 반칙을 범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는 두 번째 옐로우 카드를 받아 퇴장당했다. 이탈리아는 이제 10명이 싸우게 됐다. 재생화면으로 봤을 때 이것은 사실 매우 심한 판정이었다. 이운재는 또 한 번 가투소의 슛을 환상적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이어서 안정환이 대전 하늘로 날아오르며 이탈리아를 침몰시켰다. 그는 이것으로 스스로에게 페널티킥 실축을 속죄했고 한국에게는 가장 극적인 승리를 안겨줬다.

이탈리아는 경기를 지배하며 앞서 나갈 때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데 대한 대가를 치렀다. 이탈리아는 아마 심판을 비난할 것이다. 애매한 곳이 몇 군데 있긴 하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스스로 이런 상황을 자초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판정 문제는 끈기와 자신감, 투지를 모두 보여준 한국의 활약상을 전혀 반감시키지 못한다. 그들은 경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믿음을 잃지 않은 대가로 당당하게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8강 전이 그들에게 돌아갔다. 한국은 완벽히 목적을 이뤘다.

일본과 훌륭한 일본 팬들은 터키와의 수중전에서 1-0으로 패한 뒤 눈물을 흘렸다.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 이끄는 일본은 조 예선에서 치른 3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큰 기대를 받았다(벨기에와의 경기는 비겼다). 그러나 이날 일본은 1회전에서 찬사를 받았던 팀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됐다.

트루시에는 스즈키 다카유키와 야나기사와 아쓰시 대신 새롭게 알렉스 산토스와 니시자와 아키노리를 최전방에 배치하는 진용의 변화를 꾀했다. 놀라운 선택이었고 동시에 일본이 후회하게 될 선택이었다.

엠레 벨로졸루와 엠레 아시크가 출장정지로 나오지 못한 터키는 경기 초반에 골을 성공시켰다. 12분 위미트 다발라가 노마크 헤딩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일본은 열정적으로 역공에 나섰으나 조직력이 떨어졌다. 알렉스 산토스는 골대를 맞췄다. 그러나 일본은 빈틈 없이 성실하게 움직이는 터키 수비를 뚫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전반이 끝난 후 트루시에는 이나모토 준이치와 알렉스 산토스를 빼고 스즈키와 이치카와 다이스케를 투입했다. 이나모토(비록 터키 골의 원인이 된 코너킥과 관련이 있지만)와 산토스가 위협적으로 보였던 상황에서 이는 놀라운 조치였다.

교체 선수들은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일본은 가슴이 터지게 뛰었다. 그러나 터키는 상대를 막고 위협적인 역공을 펼치며 똑같이 응대했다. 일본은 이번 대회에서 최악의 경기를 보여줬지만 멋진 월드컵에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 일본은 큰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트루시에는 더 이상 팀을 지도하지 않을 것이다(그가 프랑스 감독 후보 명단에 올랐다는 소문이 돈다).

48년만에 두 번째로 월드컵에 출전 중인 터키는 세네갈과 8강에서 맞붙는다. 대회의 이변을 일으킨 나라들 중 적어도 하나는 4강행을 보장받게 됐다는 것은 커다란 성과다.

최고의 선수

안정환(한국)

페널티킥 실축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축이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계속 싸우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웅이다. 그리고 극적인 골로 실축을 보상했다. 이 골로 그는 한국 역사에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최악의 선수

필립 트루시에(일본)

그는 터키 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불필요하게 선수 진용을 바꿨다. 또 오노 신지를 윙백으로 쓴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때문에 페예누르트 소속의 오노는 종종 경기를 겉돌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터키 전을 이기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선수들에게 심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고의 골

위미트 다발라(터키)

수비가 아주 견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타이밍과 동작은 완벽했다. 적시에 터진 이 골로 터키는 역사적인 8강 진출에 성공해 세네갈과 만나게 됐다.

주목할 사항

월드컵사에서 유럽(UEFA)과 남미(CONMEBOL) 소속이 아니면서 4강까지 오른 팀은 오직 한 팀이다. 놀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78년 전 1회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미국이었다.

그 이후 4강에 근접한 팀들은 있었다. 그 중 카메룬이 가장 근접했다. 카메룬은 1990년 잉글랜드에게 막판에 페널티킥을 내주며 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세 팀이 8강에 진출했다. 신세계질서의 징조인가?

이렇게 판단하기는 아직 이른 것같다. 그러나 판도가 변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축구는 언제나 세계적이었다. 다만 유럽과 남미를 나머지 세계가 따라잡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백 년의 역사는 한 달만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 월드컵이 완전히 유럽과 남미의 잔치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다음 경기 전망

5월 31일 개막전에서 세네갈이 프랑스를 충격에 빠뜨리며 이변의 시작을 알린 이번 월드컵이 개막 후 처음으로 휴식을 갖는다. 8강전은 금요일에 잉글랜드-브라질, 세네갈-터키 전이 열리고 다음 날 미국-독일, 스페인-한국 전이 개최된다.

Gabriele Marcotti (CNNSI) / 이인규 (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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