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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진짜 직장의 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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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오늘은 등장인물을 모두 이니셜로 쓰려고 한다. 이니셜은 알파벳 순서에 따른다.

 A는 40대 대기업 부장이다. 그는 신입사원 B를 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런 애물단지가 없다. 일을 시켜도 움직이지 않는다. 뭐라고 야단치지도 못한다. 잘못 건드렸다간 위에서 불호령이 떨어진다.

 B가 누구길래 A가 꼼짝도 못하는 걸까. B는 이른바 ‘낙하산’이다. 공기업도 아닌데 무슨 낙하산이냐고? 무슨 신입사원이 낙하산이냐고? 모르시는 말씀. 요즘 적지 않은 기업에 힘 있는 기관 간부들의 자녀와 친인척이 ‘은밀하게, 위대하게’ 입사하고 있다. A 부장의 말이다.

 “우리도 갑(甲)이라고 욕을 먹지만 그런 기관들 앞에 서면 을(乙) 아닙니까. 내 자식, 내 조카 좀 들여보내 달라고 하면 거부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게 안 했다가는 ….”

 물론 “취직 안 시켜 주면 재미없어”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눈여겨봐 달라”는 정중한 부탁엔 칼날이 숨어 있다. 떨어뜨릴 경우 당장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유사시 기업을 곤경에 빠뜨리는 부비트랩이 될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사단이 났을 때 말이라도 넣어볼 수 있는 ‘비빌 언덕’이 된다.

 기업에 있는 친구, 선후배와 만날 때마다 이런 식의 낙하산 입사가 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청년 취업난 속에 우회로를 찾는 이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경력사원 채용이 주요 통로로 쓰인다고 한다. 중견기업 간부 C는 “그전에도 가끔 있는 일이었는데 이젠 피부로 느껴질 정도”라고 말한다.

 “경쟁이 치열한 신규채용 대신 상시적인 경력채용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들이 요즘 검증된 인력을 뽑자는 취지로 경력사원 채용을 늘리고 있잖아요. 작은 계열사에서 본인이 원하는 큰 계열사로, 희망부서까지 찍어서 오는 친구도 있어요.”

 외국계 기업 임원 D는 정치권 유력 인사에게서 취업 청탁을 받은 뒤 며칠 고민하다 “사원 채용은 본사에서 관리한다”고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능력은 어떨까. 해당 임원·간부들의 평가다.

 “우수한 젊은 사원들은 자꾸 다른 회사로 빠져나가고 결국 그런 친구들만 남게 되는 건 아닌지 솔직히 걱정이 되곤 합니다.”

 “제가 본 친구는 자격지심 때문인지 정말 열심히 하던데요. 영업 쪽으로 보냈는데 능력도 우수하고 성과도 좋아서….”

 “천차만별이지요. 한 친구는 근무태도가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언젠가는 정리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섭게 일을 하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아버지가 현직에서 그만뒀더군요.”

 사실 불안한 건 업무 능력이 아니다. 한국이 ‘음서제 사회’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조짐이다. 지난주 부모가 고소득층일수록 자녀가 대기업에 취업할 확률이 높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경제적 뒷받침으로 화려한 스펙 쌓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대학 졸업 후 다시 부모 백(배경)으로 직장까지 들어가는 건 지나친 탐욕이다. 부모 스펙이 좋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봐서도 안 되지만 입사에 힘을 동원한다면 다른 차원의 일이다. 다시 A의 얘기다.

 “개천에서 용 나오긴 힘든 세상이잖아요. 괜찮은 직장 들어가야 좋은 배우자 만나고, 안정된 생활 할 수 있다는 게 ‘부모 마음’이겠죠. 기업에서도 경영에 도움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걸 나쁘다고 할 수 없고요. 그렇지만 그런 부모 마음이 과연 떳떳할 수 있을까요? 장기적으로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될까요?”

 지난달 막을 내린 TV 드라마 ‘직장의 신’엔 124개의 자격증을 가진 계약직 미스 김이 등장한다. 진짜 직장의 신은 따로 있다. 그 부모들은 좋은 직장 들어가기 위해 조바심을 냈던 젊었을 적 제 모습을 잊어버린 것일까. 영문도 모른 채 밀려난 젊은 얼굴들은 지금 어느 거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