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전혀 칠줄 몰라도 관절염에 절뚝거려도 나의 캐디, 나의 아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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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캐디, 딸은 선수다. 지난 2일 열린 E1채리티오픈 최종라운드에서 아버지 김정원씨(왼쪽)가 딸 김보경의 뒤에 서서 티샷 방향 설정을 돕고 있다. 이 대회에서 김보경은 통산 2승째를 거뒀다. 캐디백을 메고 부지런히 딸을 쫓아다니는 아버지의 왼쪽 무릎에는 보호대가 감겨 있다. [사진 KLPG]

7일 제주도 롯데스카이힐골프장(파72)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롯데칸타타 여자오픈 1라운드. 경기가 끝나갈 무렵 김보경(27·요진건설)의 아버지 김정원(57)씨가 절뚝거리며 골프장에 나타났다.

 2001년 심근경색 수술을 받은 뒤 몇 년 전부터 퇴행성 관절염에 시달리면서도 캐디로 나섰지만 이번 대회를 앞두고 탈이 났다. 무릎에 통풍이 심해져 고열에 시달린 그는 병원에서 무릎에 고인 물을 뺀 뒤 골프장으로 달려왔다. 김씨는 “지난해까지는 며칠 쉬면 괜찮았는데 올해는 회복이 잘 안 된다. 4월에도 이틀 동안 백을 메지 못했는데 좀 쉬라는 신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보경은 지난주 열린 E1 채리티오픈에서 5년 만에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2008년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 우승 후 5년 만에 거둔 감격적인 우승이었다. 아버지 김씨는 9번 홀(파4)에서 결정적인 훈수로 딸의 우승을 도왔다.

 선두 김효주(18·롯데)에게 1타 뒤졌던 김보경은 9번 홀에서 181야드를 남긴 두 번째 샷에서 4번 아이언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19도 하이브리드로 바꿨고 이 샷이 홀 30㎝ 앞까지 접근해 버디로 연결됐다. 역전 우승의 발판이 된 승부처였다.

 사실 김보경의 아버지는 골프를 전혀 안 한다. 김씨는 “9년째 캐디를 하면서 바람에 잔디가 1m 날아가면 한 클럽을 더 잡아야 한다는 식의 노하우는 많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골프는 잘 몰라 남들 앞에서 절대 골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며 “나는 조언자일 뿐이지 모든 결정은 프로의 몫이다. 다행히 보경이가 너무 착해 내 말을 잘 따라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보경의 신뢰는 남다르다. 김보경은 “우리 집이 가난해 아빠가 캐디를 한다는 식으로 알려져 속상하다. 시작은 그랬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다. 아버지가 캐디를 해주는 게 제일 편하다. 아빠는 골프를 전혀 못 하지만 방향 하나는 끝내주게 잡아준다”고 말했다. 아버지 덕분에 김보경은 티잉그라운드나 그린에서 방향에 대한 걱정은 덜어버리고 경기에 임한다. 김씨는 “매 대회 모두 캐디를 할 수는 없더라도, 걸을 수 있는 한 계속 백을 메고 딸을 돕고 싶다. 그게 내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웃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경기를 치른 김보경은 1라운드에서 플레이가 다소 부진했다. 버디 4개를 잡았지만 14번 홀(파3)에서 티샷을 해저드에 빠뜨리며 트리플보기를 했다. 김보경은 “타깃 오른쪽으로 오조준하는 버릇이 있는데 아빠가 늘 바로잡아줬다. 오늘은 혼자 하려니 잘 안 됐다”고 말했다. 1언더파를 기록한 김보경은 단독 선두 이연주(27·하이마트)에게 4타 뒤진 공동 12위에 올랐다. 골프전문채널 J골프에서 2~3라운드를 8~9일 오후 1시부터 생중계한다.

제주=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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