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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조상님께 엎디어 읍하옵니다. 그동안 폭서에 얼마나 시달리셨겠습니까. 평소에 과묵하신 조상님의 심화를 식혀드릴 염도 내지못한 불효자를 얼마나 원망하셨겠는지.
이처럼 무성한 잡초와 먼지, 얼마나 불효자를 찾으셨겠는지, 정말로 죄송스럽기 한이 없사옵니다.
오늘은 추분. 이젠 조석으로 몹시 싸늘한 날씨가 되었읍니다.
추위를 잘 타시던 조상님께서 찬아침 이슬을 어떻게 견디시려는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로 이제 접어들었다 하오나 불효자로서는 그저 모든게 답답할 따름이옵니다.
추석을 앞당겨 오늘 조상님을 찾아뵈러 온 것도 불효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딱한 사연이 맺혀 있는 것이옵니다. 추석대목을 노리는 잡상배의 농간으로 날로 뛰어만 가는 물가에 자칫하면 조상님께서 즐기시던 약주한잔 올리지 못하지나 앉을까 그게 두려웠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또 그놈의 교통지옥이란게 있사옵니다. 효심은 태산같아도 효를 다하기엔 돈이 있어야하는 요즘의 세상, 그저 주변머리 없는 놈이라고 꾸짖지만 말아 주신다면 불효자는 한이 없겠사옵니다. 하오나 이렇게 도시를 떠나 조상님 곁을 찾아와 뵈니 한결 마음이 후련해 지는 듯 하옵니다.
몹시 송구스러운 말씀이오나 이처럼 앞당겨 조상님을 뵙게된데엔 또 하나의 맺힌 사연이 있사옵니다. 조상님때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진상물을 돌리느라고 요샌 모두가 눈이 빨개지고 있사옵니다. 참으로 왜들 극성인지 차마 눈뜨고 볼수없는 광경이옵니다.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오나 공상 싫어한다는사람 일찌기 본적은 없사옵니다. 하오나 이젠 진상이 없으면 만사가 여의치않는 이승이옵니다. 그래 세간사람들은 진상을『기름을친다』 고 하옵니다. 이것도 파한의 한가락이라고 너그러이 웃어넘겨주시 옵소서.
진상의 주변도없는 불효자는 그래저래 오늘 조상님을 찾아 뵈운것이옵니다. 하오나-.
노호치는 바람과 황량한 삼림의, 한해를 통해 가장 슬픈 계절, 살을 베는 듯한 우울한 나날들을 앞으로 불효자는 누구를 벗삼아 살아가야 할지. 조상님, 어디 약주만 드시지 말고 제발 한마디 해 주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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