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생각하는 활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하찮은 일에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시장의 어물전에서 신문지를 북북 찟어 썩은 생선을 싸고 있는 광경을 볼때.
신문의 기록성이란 그처럼 처절한 것인가.
하찮은 일에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저녁 늦게 9시쯤 편집국으로 걸려오는 익명의 독자전화. 『오늘 중앙일보 안나왔습니까. 여태 배달이 안됐는데요.』 오죽 답답했으면 전화를 걸었겠는가. 몇10만, 아니 몇 백만의 심장이 기다려 주는 신문.
정오가 지나 소년들이 윤전기에서 갓나온 뜨끈뜨끈한 신문을 한아름씩 안고 가두를 뛸 때, 『야, 중앙일보!』하는 그 힘찬 음성을 발견하는 뿌듯한 가슴.
「저널리스트」들은 그런 실력에 사로 잡혀 스스로의 직업을 천직처럼 안다.
「저널」이란 말은 원래 「일기」라는 뜻으로 쓰였다. 매일의 기록. 아직도 로마 표기로는 부기를 「저널」이라고 한다.
이른바 「맥루한」이론의 시대에 신문이 일기의 역할을 하기엔 동기가 너무 약해졌다. 사건이 있는 곳엔 펜이 달려 가기 전에 벌써 렌즈가 밀착하고 있으며, 렌즈는 어느새 시민을 사건의 현장으로 몰고 간다. 이것은 어느 특정지역이 아니라, 지구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스튜디오」화한 것이다. 지구뿐인가. 우주의 「뉴스」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매스콤」은 현장참여를 가능하게 해준다. 한낱 신문의 1일 기록이란 가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동시성의 문제는 오늘의 문명과 문화가 직면한 새로운 비전이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신문엔 새로운 경지가 남아 있다. 바로 우리가 아직도 감동과 충격과 의욕 속에서 신문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근대적인 정치·사회풍토의 음습한 잔존·미래를 지향하는 성실한 시민의 사고가 눈을 뜨고 있는 한, 신문의 새로운 역할이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활자」, 「발언하는 활자」, 「희망이 있는 활자」, 그리고 「분석하는 활자」는 새 시대의 신문상이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