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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다리에서, 길위에서 … 춤추는 50인 '서울댄스프로젝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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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춤단이 서울 광화문의 분수대에 섰다. 왼쪽부터 진세영·김윤진 감독, 고근영·고원지·배상욱·이승훈·고길성씨. 고길성·진세영씨와 근영양은 가족이다. 고길성씨는 “간혹 냉랭한 사람들을 보면 타인에게 쉽게 공감하지 못하고 남들 시선 때문에 박수 치지 못하던 예전의 내 모습이 보인다. 그들에게 마음으로 이렇게 외친다”고 했다. ‘나도 당신과 똑같은 넥타이인데 춤 춰요. 당신도 추는 게 어때요?’게릴라 춤판은 북촌, 광화문 광장 등에서 벌어질 예정이다. 서울시 청사,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는 게 목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달 24일 오후 8시 30분 지하철 5호선 영등포구청역. 수상한 무리 20여 명이 한꺼번에 객차에 올라탔다. 지름 0.5미터쯤 되는 미러볼 탈을 뒤집어 쓴 이도 포함돼 있었다. 평범한 시민인양 30초쯤 위장하던 이들은 앰프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마자 객석 통로에 한 줄로 늘어섰다. 앞으로 뒤로 스텝을 밟고, 팔을 뻗어 돌리는 등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지하철 문이 열리자 우르르 객차에서 내렸다. 웃으며 호응하는, 혹은 그러거나 말거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시민들에게 ‘서울댄스프로젝트, 춤 추는 서울-게릴라 춤판’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고나서다.

 이렇게 5월 이후 서울 곳곳에선 춤판이 벌어졌다. 20대 후반만 되어도 출입이 저지될까 조마조마한 클럽, 혹은 서민 최후의 에너지 발산 공간인 노래방을 말하는 게 아니다. 훤한 대낮 동호대교에서, 홍대의 길 위에서, 청계천 냇가에서, 지하철에서 50인 50색의 ‘춤단’이 5월부터 게릴라 춤판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릴라 춤판은 서울문화재단(대표 조선희)이 기획한 서울댄스프로젝트의 첫번째 프로그램이다. 공공예술의 방법으로 미술을 택하는 사례는 많지만 춤을 끌어낸 것은 처음이다. ‘춤을 사랑하는 서울 시민 누구나’를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오디션을 거쳐 ‘춤단’ 50명을 뽑았다. 재단이 제시한 춤단 특전은 ▶음악이 나오면 어디서든 춤출 수 있는 배짱과 자신감 제공 ▶절대 밥은 굶지 않도록 식사 제공 등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최고령 춤단원 고길성(43·회사원)씨는 오디션 날짜가 출장과 겹치자 비행기 티켓 등 증빙 자료까지 첨부해 추가 오디션을 요청했다. 그는 “40대 가장의 춤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고 싶다”고 말하고 합격했다.

 초등학생부터 40대까지 뒤섞인 춤단은 4월 한 달간 워크숍을 거친 후 현장에 투입됐다.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김윤진(44·국민대 공연예술학부 교수) 기획감독은 “춤 출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공공장소, 실내가 아닌 ‘태양발’ 받고 출 수 있는 곳을 택해 서울의 장소성을 살리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타워팰리스의 그늘이라 불리는 구룡동 판자촌에서 선녀춤을 춘 ‘구룡동 판타지-신화재건 프로젝트, 2011’, ‘춤추는 꽃중년 프로젝트, 2012’ 등 무대라는 틀을 벗어나 일상의 춤을 회복하는 활동을 벌여온 무용가다.

 “본래 삶에서 시작된 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성역화되고 형식화됐어요. 노동, 제의, 일상에서의 춤을 회복하고 싶었죠.”

 5월 4일 동호대교가 첫 무대였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두 시간 동안 다리를 두 번 왕복하며 춤을 췄다. 처음엔 춤단도 쭈뼛거렸지만 차츰 몸이 풀리고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노을이 내려앉자 한강물이 반짝이며 물들었다. 지나가던 차들이 속도를 늦추고 창문을 열어 사진을 찍었다. 박수 치고 초코파이도 던져주며 응원했다. 40대 가장 고길성씨는 눈물을 쏟았다.

 “무아지경이랄까, 노을이 지는데 뭔가 울컥 올라오더라고요. ‘내가 살아 있구나, 내가 존재하는구나, 이렇게 재미있고 즐겁게 살고 싶은 내 욕망을 억누르지 말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순간만큼은 거대한 서울, 일, 돈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졌어요.”

 그는 영업직 회사원, 이른바 ‘감정 노동자’다. “지난해 이맘때는 무기력과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았다면, 지금은 그런 것들을 옆에 끼고 ‘사는 게 그런 거지’라 받아들이게 됩니다.”

 춤단은 5월 12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린 ‘춤바람 선포식’에선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을 끊고 즉석 춤판을 벌였다. 18일 저녁엔 청계천으로 출동해 우비 입고 비 맞으며 춤을 췄다. 25일엔 홍대에서 ‘달빛 발광 클럽’이란 이름의 야외 클럽을 열었다. 음악 소리에 가게 문 닫고 달려온 쭈꾸미 철판구이집 총각들, 등산복 차림의 중년 여성들, 양복쟁이 신사, 외국인, 젊은이 할 것 없이 합류했다.

 대구가 고향인 이승훈(29·회사원)씨는 돈 벌러 서울 온 지 3년째다.

 “서울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사람도 너무 많고 바쁘고 복잡하잖아요. 그런데 춤 춘 곳들은 좋아지더라고요. 우리 춤을 본 사람이 기분 좋아져서 가면, 그 사람과 마주치는 사람도 좋을 거고, 그렇게 좋은 기분이 전파되면 서울이 좀 더 살만해질 거라 생각해요.”

 춤 자체가 주는 마법도 있었다. 키가 잘 안 커서 ‘키 크는 약’까지 먹었던 고원지(11)양은 춤단 한 달여 만에 2cm가 컸다. 프로 마술사인 배상욱(24)씨는 “이 직업으로 아이도 키우고 번듯한 가장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춤을 추니 마술사로 무대에 섰을 때 보다 더 멋있어져 자신감이 생겼단다. 춤단의 이야기를 듣던 김 감독은 기자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을 던졌다.

 “누가 ‘지금이 어느 땐데 춤이야?’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려고 벼르고 있어요. ‘시간 남아 추는 게 아니다. 힘 내서 살려고 추는 거다. 그게 춤의 전통이고 본질이다’라고요.”

 서울댄스프로젝트(www.seouldance.or.kr)는 게릴라 춤판 외에도 각 지역 모임에 맞는 춤을 추는 ‘춤바람 커뮤니티’, 8월 중 한강에서 열리는 대규모 춤판 ‘춤 야유회’ 등으로 10월까지 이어진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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